홍어와 근대주의

2013.11.08 21:09 입력 2013.11.08 22:33 수정
황현산 | 고려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어느 망나니 누리꾼이 홍어를 들먹여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모욕한 사진과 글을 일베에 올려 유족에게 고소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고인에 대한 모욕도 모욕이거니와 홍어가 겪은 수난도 가슴 아프다.

홍어는 홍어목 홍어과에 속하는 납작한 마름모꼴의 물고기로 제대로 성장할 경우 길이가 1.5미터를 넘는다. 제주도에서 흑산도를 거쳐 서해안 일대에 이르는 연안에서 고루 잡히는 바닷고기다. 그러나 옛날부터 홍어를 즐겨 먹었던 전라도 남쪽 해안지방에서는 전통적으로 동지에서 설날 전후에 이르는 한겨울에 흑산도 근해에 알을 낳으러 왔다가 잡히는 홍어를 특정해서 ‘홍어’라고 부른다. 그것이 ‘진짜 홍어’다. 물고기의 맛을 결정하는 것은 그 물고기가 잡히는 바다의 플랑크톤인데, 한겨울의 흑산도 바다에는 발광 플랑크톤이 많다고 한다. 그 발광 플랑크톤이 홍어 피부의 ‘곱’에 달라붙어 우리가 알기 어려운 어떤 작용을 하는 것이 틀림없다.

[사유와 성찰]홍어와 근대주의

냉동시설이 없었던 옛날에 홍어회는 겨울에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추수가 완전히 끝난 겨울에, 혼례를 치르는 집에서는 잔치 음식의 기본으로 돼지 한 마리와 홍어 한 닢을 준비한다. 거기에 김장김치를 곁들이면 자연스럽게 삼합이 된다. 잔칫상에 반드시 홍어가 놓여야 하는 것은 막걸리 안주로 홍어만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적당하게 삭힌 홍어 한 점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다가 어금니와 볼 사이에 그것을 밀어 넣고 제대로 빚은 막걸리를 마시면 무어라고 설명할 수 없는 맛이 난다. 그래서 ‘홍탁’이라는 말이 생겼다. 막걸리 없는 홍어회는 완전한 홍어회가 아니다.

어느 입심 좋은 사람의 책에서 삭힌 홍어의 유래를 설명하는 글을 읽었다. 옛날 우리 선조들이 흑산 앞바다에서 홍어를 잡아 열흘 넘게 배에 실어 목포나 영산포로 운송하는 동안 신선도를 잃고 부패한 홍어에, 암모니아성의 역한 냄새에도 불구하고, 그 나름대로 독특한 맛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는 내용이다. 그럴듯한 말이지만, 나 같은 홍어의 본고장 사람이 듣기에는 가당치도 않은 설명이다. 냉동시설이 없는 옛날에도 어부들은 끊임없이 바닷물을 길어 생선에 붓는 방식 등으로 상당한 기간 그 선도를 유지할 줄 알았다. 그래서 연평도에서 잡은 조기나 신안에서 잡은 민어가 신선한 상태로 서울 사람의 밥상에 오를 수 있었다. 더구나 홍어는 겨울에 잡는 물고기여서 열흘이나 보름 안에 부패할 수는 없었다. 내가 중학생이던 1950년대 말만 해도 연안 어선은 거의 모두 옛날과 다름없는 돛단배들이었지만 어시장에 부려진 홍어는 싱싱했다. 삭히느냐 마느냐는 먹는 사람의 일이었다. 우리 집에서는 어른들이 홍어 한 닢을 사오면 대개 연골이 붙은 부분은 삭혀 술안주로 썼지만, 양 날개의 신선한 살은 양념간장을 발라 구워 반찬으로 썼다.

운송 중 부패 운운하는 식의 설명에 내가 늘 흥분하는 것은 거기서 천박한 과학주의나 일종의 식민지주의 같은 것을 보기 때문이다. 식민지주의라는 말이 지나치다고 생각하는가. 저 불행한 대에 일본인들이 우리의 김치나 온돌을 헐뜯을 때 들이대던 논리가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섣부른 근대주의자들의 주장이나 설명 방식에는 이해가 쉽지 않은 것들을 가난이나 몽매함의 탓으로 돌려 농어촌을 도시의 식민지로 삼으려는 음모가 종종 숨어 있다. 그 음모 속에서 삶의 깊은 속내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자만하는 자들의 천박한 시선 아래 단일한 평면이 되어 버린다. 나름대로 삶의 중심이었던 자리들이 도시의 변두리로 전락하는 것은 그 다음 수순이다. 식민주의의 권력자들은 삶을 통제하기 전에 먼저 삶을 수치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물론 이 일은 도시 안에서도 일어나고 한 사람의 도시민 내부에서도 일어난다.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이 모더니즘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할 때 염두에 두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와 다른 것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근대주의는 한 시대의 과학으로 (또는 그 과학에도 미치지 못하는 허접한 지식으로) 미래의 지혜만이 해명할 수 있는 것들을, 또는 미래의 지혜 그 자체를 억압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홍어회는 부패한 음식이 아니다. 그것은 발효의 효과를 이용하여 조리된 음식이다. 우리의 불투명한 내부는 우리 삶의 부끄러움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삶이 다른 삶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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