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없는 ‘희망의 경제학’

2014.01.26 20:59
김진송 | 목수·문화평론가

이 사회에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일만큼 더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건 없다. 사회적 성공에 이르는 인맥을 얻기 위한 매우 효율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아이들은 몰라도 그걸 모르는 어른은 이 사회에 단 한 명도 없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그 문에 진입하지 못하는 책임은 온전히 개인적인 능력과 자질과 노력이다(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이런 사회에서 경쟁을 통한 성공은 언제나 비합리적으로 완성된다. 하지만 이런 비합리적 구조는 학력에 실패한 삶을 그런 대로 살 만한 세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다. 경쟁이란 거기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포함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경쟁에서 실패한, 열등감으로 자책하는 인간에게 ‘네 탓이 아닐 수 있어’라고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다. 거기에 ‘그게 바로 인생이야’라는 심오한 깨달음을 덧붙이면 개인과 사회의 무기력한 가치관은 깊은 일체감을 갖게 될 것이다. 사회는 바람직한 시스템을 하나 완성시킨 것이다.

[문화와 삶]희망 없는 ‘희망의 경제학’

큰 기업들이 엄청난 이익을 내고 있다는데 정작 일상의 삶은 팍팍하기만 하다. 경기는 위축되고 폐업은 늘어간다. 뭐가 잘못된 거지? 잘못된 건 처음부터 없었다, 경제적 성장에 이윤을 얻는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것은 거기서 소외된 사람들조차 자신의 능력과 기회가 점점 축소되고 있다는 사실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희망’과 ‘긍정’을 자신의 가치로 확립한다. 누구나 ‘희망을 잃지 않는 것’에 희망을 건다. 내세울 수 있는 사회의 가치가 ‘희망’밖에 없다면 그 사회는 ‘불행을 감내하는 걸 강요하는 사회’라는 걸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다. 사회는 바람직한 시스템을 또 하나 완성시킨 것이다.

아무도 그 내용을 모르지만 누구나 창의성을 앞에 내세운다. 사람들은 미래를 꿈꾸는 상상력이 유일한 희망일 수 있다고 믿는다. 성공과 실패의 조건은 개인적인 자질과 능력이 아니라 창의적인 발견에 이익을 얻는 집단이 제시하는 조건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상상은 자유이며 창의성은 너의 능력이다. 마음껏 발휘하라. 단, 그걸 받아들이는 것은 네가 아니라 나에게 달렸다.’ 당연히 사회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수위의 상상력만이 허용되며 그런 창의성만이 성공을 가져온다. 이 사회의 시스템이 제시하는 해법은 여기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는다(기껏해야 경쟁을 통해 창의적인 사업체를 선정하고 몇 푼의 돈을 꿀 수 있는 자격을 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같은 해법이 그들이 제시할 수 있는 전부다). 사회적 성공과 실패의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윤리적인 개인에게는 ‘난 자질이 없어’라고 말하거나 ‘세상이 날 알아주지 않아’라는 공정한 심리적 위안이 마지막으로 남는다. 그렇지 않다면 ‘좌절과 실패를 딛고 끊임없이 다시 일어서는 불굴의 도전정신’을 내재화하는 무한긍정의 아이콘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이제 창의적인 개인의 노력마저 ‘우연’과 ‘비합리적’으로 이루어지는 시장의 질서에 편입시키면 권력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경제의 장을 완성시킬 수 있게 된다.

창의성에 의한 개인의 사회적 성공의 패러다임은 도박의 패러다임과 흡사하다. 확률? 그것도 아마 도박이 제시하는 확률과 흡사할 것이다. 0.1%의 확률을 위해 경쟁적으로 창의력을 키우고, 실패해도 여전히 자신의 책임으로만 남는 그런 게임에 우리는 인생을 걸어야 한다. 카지노에서 이기는 길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카지노 주인이 되는 것. 그 전까지는 아무리 많은 우연과 기회가 있다고 해도 실패할 확률은 여전히 99.9%다. 이것이 바로 자신들의 경제적 위기를 교묘히 사회적 위기로 포장해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시킨 뒤 개인의 경쟁을 통해 이윤을 얻으려는 집단이 주장하는 창의성이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