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희망

2014.01.19 21:08
손홍규 | 소설가

한 편의 소설이 완성되는 순간은 소설가가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 아니라 독자와 소설이 만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좋은 소설은 세대를 거듭해 독자를 만나기에 다시 말해 좋은 소설이란 완성의 순간이 매 순간 지연되는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조금 과장하자면 결코 완성되지 않는 소설이야말로 가장 좋은 소설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소설 가운데 두 편을 언급하고 싶다. 작가들이 가장 존경하는 작가라 일컬어지는 미국의 소설가 필립 로스의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독일의 소설가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가 그것이다.

[문화와 삶]인간의 희망

이 소설들을 떠올리게 된 이유는 중앙대 총학생회가 청소노동자의 파업과 관련해 민주노총에 중앙대를 떠나라고 요구했다는 기사를 본 탓이다. 이 두 편의 소설은 각각 매카시즘의 광풍에 몰락하는 사람과 거대보수언론의 왜곡되고 선정적인 여론몰이에 의해 파멸하는 사람을 다룬다.

대체로 이 소설들은 사회공동체가 공유하는 오해와 편견이 어떤 방식으로 사회구성원을 짓밟는지를 보여주는 일례로 언급되지만 나는 오히려 개인의 신념과 그 신념을 지키기 위한 개인의 선택과 용기가 어떻게 스스로를 파멸시키는가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한다. 사회적 오해와 편견에 맞서 투쟁하려 애쓸수록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아이러니를 더 강렬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인물 스스로가 옳다고 믿는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기꺼이 몰락과 파멸을 감내한다는 점이다.

두 소설의 인물들은 사회가 인정하는 진리의 편에 선 사람들은 아니다. 사회적 신분상승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획득한 신분계층이 요구하는 사상마저 받아들일 수는 없었던 필립 로스의 인물과 잃어버린 명예를 회복할 수단과 방법이 없어 결국 기자를 살해하게 되는 하인리히 뵐의 인물은 오해와 편견에 의해 부서졌다기보다 차라리 오해와 편견에 의해 부서지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그들이 그런 선택을 한 이유는 루쉰이 <고향>에서 말한 희망의 정의를 인용해 생각해 볼 수 있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다. 희망은 땅 위의 길과 같다. 땅 위에는 길이 없지만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인 것이다.” 루쉰이 생략한 말을 굳이 되살려보자면, 인간의 희망이란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그 무엇이 아니라 인간이 걸어가는 길 바로 그 노정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희망이란 만들어가는 것이며 어떤 길을 걷느냐가 곧 어떤 희망을 갖느냐이다.

필립 로스의 인물과 하인리히 뵐의 인물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몰락하고 파멸했으나 사회적 오해와 편견에도 불구하고 타협하지 않고 개인의 신념을 지켜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그것이 곧 인간의 희망임을 보여준다. 그들은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갔고 결국 부서졌으나 인간의 희망을 보여주었다.

오해와 편견이 오해와 편견일 수 있는 이유는 나름의 논리를 지녔기 때문이다. 매카시즘이 그러했고 거대보수언론도 그러했다. 중앙대 총학생회가 제시한 이유들도 전혀 근거가 없지 않다. 중앙대의 이미지 하락을 당사자보다 더 걱정하는 사람이 있을까. 어느 쪽이나 논리는 충분하다. 최종적으로 어떤 가치를 지향하느냐에 따라 선택이 달라지며 올바른 선택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중앙대 총학생회는 용기 있는 선택을 했을 것이다. 다만 나는 중앙대 총학생회가 바라는 대로 민주노총을 쫓아내고 그렇게 만든 길이 어디로 이어질지 퍽 궁금하다. 그 희망은 아름다운가. 그런 게 인간의 희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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