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5월 전봉준장군 유시 발견

2014.03.06 20:56
조운찬 문화에디터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전봉준이 남긴 자료는 많지 않다. 시골 훈장의 아들로 태어나 서당에서 공부했다는 기록으로 봐 어느 정도의 학식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농민 봉기 때 돌렸다는 ‘사발통문’이나 ‘격문’, ‘포고문’ 등을 직접 지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작성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으니 전봉준의 작품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오지영은 1940년 펴낸 <동학사>에서 전봉준이 13세 때 지었다는 ‘백구시(白鷗詩)’라는 한시를 소개했다. “自在沙鄕得意遊(자재사향득의유)/ 雪翔瘦脚獨淸秋(설상수각독청추)/ 蕭蕭寒雨來時夢(소소한우래시몽)/ 往往漁人去後邱(왕왕어인거후구)// 許多水石非生面(허다수석비생면)/ 閱幾風霜已白頭(열기풍상이백두)/ 飮啄雖煩無過分(음탁수번무과분)/ 江湖魚族莫深愁(강호어족막심수)”

한시는 백구(갈매기)에 빗대어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학계는 한시의 어휘, 비유로 보아 10대 초반의 어린아이가 지은 작품으로 여기지 않는 분위기다.

[경향으로 보는 ‘그때’]1974년 5월 전봉준장군 유시 발견

이와 달리 1974년 5월11일 경향신문이 보도한 ‘전봉준 유시(遺詩)’는 전봉준이 직접 쓴 한시로 평가받는다. 이해 정읍의 향토사학자 최현식(당시 51세)은 정읍군지에 수록할 자료를 모으다 천안 전씨 족보에서 전봉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한시를 발견, 공개했다. 이 시는 족보의 ‘전봉준 장군’ 난의 여백에 ‘운명(殞命) 유시’라는 제목으로 쓰여 있었다. 유시는 혁명에 실패한 뒤 사형을 앞둔 전봉준의 착잡한 심경을 담고 있다. 경향신문이 보도한 유시와 소설가 김동리의 번역문은 아래와 같다.

“時來天地皆同力 運去英雄不自謀 愛民正義我無失 愛國丹心誰有知(때 만나서는 천지도 내 편이더니/ 운 다하니 영웅도 할 수 없구나/ 백성 사랑 올바른 길이 무슨 허물이더냐/ 나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리)”

최현식은 뒷날 이 시를 자신의 저서 <갑오농민혁명사>(1994·신아출판사)에 수록했다. 그러나 그는 이 절명시를 천안 전씨 족보에서 발견했다고 쓰지 않고 “이종학 소장이 수집한 일본 ‘시사신보(時事新報)’에서 인용했다”고 밝혔다. 시사신보는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성두한 등 동학 지도자들이 1895년 3월29일 사형선고를 받고 다음날 교수형을 당했다고 보도한 신문이다.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은 “최현식 선생이 전봉준 절명시를 본 것은 전씨 족보가 먼저였지만, 뒤에 시사신보에서 출처를 확인해 이 신문을 전거로 인용한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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