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란 무엇인가

2014.03.07 20:30 입력 2014.03.09 14:05 수정
배병삼 | 영산대 교수·정치사상

교사들 사이에, 북한이 남침하지 못하는 이유가 중이(중학교 2학년)가 무섭기 때문이라는 우스개가 있다. 한데 우스갯소리만은 아닌 듯하다. 새 학기 중등교원 인사에서 고교 교사들이 중학교로 가길 꺼려 억지로 배정했다는 기사가 증거다. 또 명예퇴직 희망자가 갑자기 늘어난 것도 방증사례다.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통제가 안된다는 것이다. 울컥, “나쁜 놈들, 옛날에는 선생님 그림자도 안 밟았는데….” 싶지만, 막상 청소년 자살률이 세계 최고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문득 안쓰러운 마음이 흥분을 덮어버린다.

[공리공담]학교란 무엇인가

국가에서 건물을 만들고, 거기 사람을 수용해놓고, 경찰이 상주하면서, 화장실에조차 시시티브이가 설치된 곳은, 교정시설일까 학교일까?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속담처럼, 우리는 학교라는 이름을 걸어놓고 그곳이 교도소로 바뀌는 줄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이들을 (동물인 사람을!) 마치 식물인양 한 평도 되지 않는 책걸상에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묶어놓고, 지식이라는 고농도의 에너지를 입안에다 억지로 부어넣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아이들은 학교에 오면 내내 잠에 어려 있었던 것은 아닐까. 또 견디다 못해 제 스스로 목숨을 버렸던 것은 아닐까.

양계장의 닭들 처지와 우리 청소년들이 처한 환경은 뭐가 그리 다를까. 밤새 불을 밝혀놓은 좁은 닭장 속에 갇혀, 고열량의 사료를 삼키면서 알만 낳기를 종용받는 저 닭들의 처지와 학교라는 이름의 좁은 공간 속에서, 교사들이 투여하는 압축된 지식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암기하는 아이들의 처지가 겹쳐 보이는 점들이 많다.

이름을 놓고 봐도 학교보다 교도소가 더 근사하다. ‘가르쳐(矯) 이끄는(導) 곳(所)’이, ‘배우는 집’을 뜻하는 학교보다 오늘날 학교의 실체를 더 잘 표현하는 것 같지 않은가. 학생들이 침묵하는 곳은 학교일 수 없고, 그곳에 기쁨이 있을 수 없다. 아니 생명이 있을 리 없다. 봄이 침묵하는 땅에 가을걷이 할 것이 있을 리 없으니, 창의력, 창조성, 창조경제는 어불성설이다.

본래의 학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세상에서 처음으로 학교를 연 사람은 공자다. 공자가 내건 교육이념이 <논어>의 첫 구절에 실린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않으랴’다. 요약하면 ‘학습하면 기쁘다’라는 말이다. 이걸 뒤집어 읽으면 ‘기쁘지 않으면, 학습이 아니다’라는 말이 된다. 학교가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 넘쳐나는 곳이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갖춰야 한다. 우선 질문이 있어야 한다. 둘째는 그 질문을 풀어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 학생들에겐 질문이 없고, 질문이 없으니 스승 역시 없다.

어떻게 할 것인가. 학생이 아니라 학교를 바꿔야 한다. 국가가 요구하는 인재를 만드는 곳이 아니라, 배우는 사람이 기쁨을 얻는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工夫’라는 한자를 우리는 공부라고 읽지만, 중국말로는 쿵푸라고 발음한다. 지금 이 차이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공부라면 ‘주어진’ 책을 눈으로 읽고 머리로 암기하는 지식활동을 연상한다. 이게 학교를 황폐하게 만들어 학생들을 죽음으로 몰고 있다. 쿵푸는 몸을 수련하고, 또 닦을수록 몸의 변화를 체감한다. 즉 공부가 머리로 익히는 지식이라면, 쿵푸는 제 몸의 변모를 실감하는 것이다.

이미 공부의 시대는 끝났다. 유교의 폐단을 두고 중국의 문호 루쉰은 ‘예교가 사람을 잡아먹는다’라고 일갈했다. 사람을 살리려고 태어난 사상도 사람을 잡아먹기에 이르면, 없애야 한다는 뜻이다. 교도소로 타락한 학교도 마찬가지다. 공부를 쿵푸로 되살려, 배워서 기쁨을 얻는 장소로 바꾸지 않는 한, 우리 아이들은 계속 죽어나갈 것이다.

쿵푸의 공부는 고통의 강을 통과하지만 끝내 기쁨을 얻는다. 공부를 통해 제 몸이 단단해지고 또 건강해지는 것을 ‘스스로’ 느끼기 때문이다. 이때 스승에 대한 고마움도 몸을 감싼다. 스스로 성장을 느낄 수 없는 공부는 ‘허학’이요, 손에 잡히지 않는 추상을 강요하는 것은 공리공담이다. 가짜 학교를, 질문 없는 학교를, 바꾸어야 한다.

급변하는 세상에 부응하는 인재를 기르지 않으0면 나라의 장래가 어떻게 되겠느냐고? 옛 어른들 말씀을 빌려 답하자면, 사람 나고 돈 났고, 사람이 있고서야 나라도 있는 법이다. 자신을 살리는 길을 찾는 것이 참된 공부요, 그 길을 찾도록 인도하는 곳이 진짜 학교가 아닌가. 대학조차 질문은 없고 교수의 독백만이 강의실을 채우는 ‘침묵의 봄’을 맞이한 비감함이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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