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경보기’를 잠시 끄며

2014.06.01 20:30 입력 2014.06.02 11:20 수정
강신주 | 철학자

비상경보기 소리가 둔탁하다. 너무 오래 쳐서 그런가? 아니면 너무 자주 쳐서 식상한가? 마침내 2년 넘게 격주로 울려 퍼진 비상경보기를 바꿀 때가 되었나 보다. 이제 새로운 경보기를 구해야 할 것이고, 삶의 위기를 더 예리하게 지각하는 사람도 필요할 것이다. 앞으로 어떤 사람이 자신만의 비상경보기를 울릴지 모르지만, 그도 나처럼 벤야민의 정신을 공유했으면 한다. <일방통행로(Einbahnstraße)>에서 벤야민은 말하지 않았던가. “소동에 의해서든 아니면 음악에 의해서든 또는 도움을 요청하는 외침에 의해서든 진리는 화들짝, 돌연 일격을 당한 듯 자기 침상에서 깨어나길 바란다. 진정한 작가의 내면에 갖춰져 있는 비상경보기의 숫자를 다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집필한다’는 것은 그런 비상경보기를 켠다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철학자 강신주의 비상경보기]‘비상경보기’를 잠시 끄며

연탄가스로 사경을 넘나들었던 사람에게는 하나의 비상경보기가 장착될 것이다. 어느 날 친구들과 여행을 떠났다. 일정이 너무나 피곤했었는지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모든 사람이 바로 곯아떨어졌다. 이때 한 사람만이 코를 벌름거리며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난다. “아! 가스다.” 내면에 장착된 비상경보기가 울린 것이다. 이렇게 울린 비상경보기는 밖으로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그는 친구들을 흔들어 깨우며 울부짖는다. “얘들아! 일어나. 빨리 나가야 해.” 친구들이 말을 듣는다면 다행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친구들은 그의 말을 무시할 것이다. 그들은 무색무취의 연탄가스가 얼마나 무서운지 경험해본 적이 없으니까. “야! 왜 그래. 그냥 자. 너 너무 히스테릭하다.” 이럴 때 위기를 직감한 그 사람은 당혹감을 느끼겠지만, 그래도 계속 친구들을 흔들며 일어나라고 외치며 비상경보기를 울릴 수밖에 없다.

‘비상경보기’라는 제명을 가진 나의 칼럼은 이런 절박한 정신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위기가 코앞에 도달했는데, 그걸 모르는 이웃들을 어떻게 방치할 수 있다는 말인가. 물론 나도 때로는 냉소적으로 변할 때도 있다. 나의 글에 꿈쩍도 않는 이웃을 보며, 심지어 조롱마저 던지는 이웃을 보면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나는 냉소적으로 변하거나 절망하지 않았다. 그래서 격주마다 나는 지치지 않고 새롭게 경보기를 울릴 수 있었던 것이다. 돌아보면 정말 내 자신이 대견하기만 하다. 나의 삶보다는 타인들의 삶이 더 소중하지 않았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을 테니까. 물론 후회도 든다. 2년간 울렸던 ‘비상경보기’보다 위기를 더 예리하게 진단하고 아울러 그걸 더 극적으로 표현했을 수도 있지나 않았는지. 이런 후회는 나만의 몫, 혹은 나만의 빚으로 계속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논어>에는 “새는 죽으려 할 때 그 울음소리가 구슬프고, 사람은 죽으려 할 때 그 말이 착하다”는 멋진 말이 있다. ‘비상경보기’를 마무리하면서 진보를 지향하는 우리 이웃들에게 착한 말 한마디를 하고 싶다. 아니 어쩌면 내 성격상 마지막 격한 경보음 소리인지도 모를 일이다. 보수적인 사람은 자신과 자신이 가진 것만을 사랑한다. 그러니 이건 유치한 사랑이고 그래서 사실 사랑이라고 할 것도 없는 것이다. 반면 진보적인 사람은 그보다는 타인과 타인이 가진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당연히 진보적인 사람은 항상 ‘사랑’의 의미를 되짚어 보아야만 한다. 그래야 자신의 사랑이 진정으로 사랑인지의 여부를 반성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여기에 하나의 시금석이 될 만한 말을 들려주려고 한다. <인간의 대지(Terre des Hommes)>에서 생텍쥐페리(Saint Exupery)가 했던 말이다. “사랑은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 “이웃에게 남기는 ‘착한 말’ 한마디
배우자와 어르신과 젊은이들과
제대로 끈덕지게 마주보자
서로 마주보는 게 사랑이다”

진보를 표방하는 사람, 그러니까 제대로 타인을 사랑하며 살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생텍쥐페리의 이 말에 코웃음을 칠 수 있어야만 한다. 생텍쥐페리의 생각과는 달리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마주보는 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얼굴을 그리고 타인의 삶을 마주본다는 건 정말 똥줄 빠지게 힘든 일이다. 그러니 그런 힘든 일을 기꺼이 감내할 때에만, 우리는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라. 사랑에 빠진 연인은 처음에는 서로의 얼굴을 응시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흥미진진한 영화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기 마련이다.

영화의 자리에는 어떤 것이라도 들어올 수 있다. 결혼을 했다면 아이가, 종교를 가졌다면 신이, 이도저도 아니라면 텔레비전 영상일 수도 있다. 서로 마주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걸 정당화할 정도로 충분히 재미있거나 혹은 정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그 자리에 들어올 수 있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일종의 동지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도가 되는 것도 아니고, 아이를 중심으로 생활하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되는 것도 아니다. 같은 방향을 보느라고 서로를 무관심에 방치해두는 것이 어떻게 사랑일 수 있다는 말인가. 그건 단지 사랑의 제스처, 혹은 거짓된 사랑일 뿐이다. 그러니 생텍쥐페리의 말을 조롱이라도 하는 듯 서로 마주보려는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진짜 사랑은 그렇게 시작하는 거니까.

이제 천천히 나이가 들어 낯설게 변해가는 배우자와 서로 마주보자. 주름진 얼굴로 시름에 잠겨 있는 밀양 어르신들과도 서로 마주보자. 자본과 권력의 야합이 만든 경제 조건에 내던져진 생계를 걱정하는 우리 젊은이들과 서로 마주보자. 세월호의 비극이 남긴 유족들과 싸늘하게 주검으로 돌아온 희생자들과 서로 마주보자. 그렇지만 제대로 끈덕지게 마주보자. 이미 보아버려서 결코 본 것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마주보자. 불편하고 힘들지만 이렇게 서로 끈질기게 마주볼 때 사랑이 필요했던 우리 이웃의 얼굴은 우리의 영혼에 지워지지 않게 각인될 것이고, 반대로 우리의 사랑은 우리 이웃의 영혼에 따뜻함으로 그래서 연대의 희망으로 남을 테니까 말이다. 이렇게 서로 마주볼 때에만 가짜 사랑이 아니라 진짜 사랑이 싹틀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렇다. “사랑은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마주보는 것이다.” ‘비상경보기’의 마지막 착한 말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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