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전 생각

2014.09.21 20:48 입력 2014.10.13 14:37 수정
정끝별 | 시인·이화여대 교수

▲ 본전 생각

집 근처 노점에서 산 호박잎
스무장에 오백 원이다
호박씨야 값을 따질 수 없다지만
호박씨를 키운 흙의 노고는
적게 잡아 오백 원
해와 비와 바람의 노고도
적게 잡아 각각 오백 원
호박잎을 거둔 농부의 노고야
값을 따질 수 없다지만
호박잎을 실어 나른 트럭의 노고도
적게 잡아 오백 원
그것을 파느라 저녁도 굶고 있는
노점 할머니의 노고도 적게 잡아 오백 원
그것을 씻고 다듬어 밥상에 올린
아내의 노고도 값을 따질 수 없다지만
호박잎을 사들고 온 나의 노고도 오백 원

그것을 입안에 다 넣으려고
호박쌈을 먹는 내 입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 최영철(1956~ ) 부분

[경향시선 - 돈 詩]본전 생각

△ 호박잎도 이제 끝물이다. 쇠지는 않았을까 걱정하며 호박잎 1㎏을 7800원에 인터넷 주문을 한다.

소고기나 참치를 넣은 강된장에 푸릇하게 쪄낸 호박잎쌈을 해먹을 요량이다. 보리밥이나 갈치속젓을 곁들이면 금상첨화. 쌈 싸먹고 남은 호박잎은 쌀뜨물에 들깨가루를 넣고 호박잎된장국을 끓여 먹을 게다. 이 시를 발표한 지 10여년이 지나긴 했어도, 이 맛난 식재료 값이 “스무 장에 오백 원”이라니 싸도 너무 싸다.

시인의 셈법에 따르면 호박잎을 둘러싼 흙, 해, 비, 바람, 트럭, 노점 할머니, 나의 노고들이 각각 오백 원씩이니 도합 삼천오백 원. 물론 호박씨 값은 물론 농부와 아내의 노고는 셈으로 치지 않은 값이다.

본전 오백 원 내고 ‘적게 잡아’ 삼천오백 원짜리 호박쌈을 먹으니, 입이 찢어지지 않을 리 없다. 알고 보면 세상엔 공짜, 아니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노고들이 ‘천지삐까리’다. 그 노고들이 우리 영혼까지를 살찌우는 이름 하여 자연이고 사랑이다.

그러니 시인의 셈법으로 따진 ‘본전 생각’이 우리의 비전이다. 이쯤 되면 ‘밑져야 본전’이라는 말도 다시 해석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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