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 숲에서의 짧은 키스

2015.03.22 20:51 입력 2015.03.22 21:25 수정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 단풍 숲에서의 짧은 키스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너는 비행기를 타고 산맥을 넘었다

여러 해 동안 너는
밤의 열기
가볍고도 유쾌한 사랑

그러나 나는 아직
체리향이 든 해열제를 먹고 누워 있는
키 작은 아이

단풍 숲에서의 짧은 만남이 오기도 전에
내 안에서 솟아오른 불길이
산맥을 넘어

너의 입술을 모두 태워버린다

- 박상순(1962~)

[경향시선 - 미래에서 온 詩]단풍 숲에서의 짧은 키스

△ 시가 다른 예술과 달리 물상들을 그려내는 데 특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미지를 다루는 데 있어 상상하는 무엇이든 가능한 배치를 이루게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냉장고 안에서 기린이 기어 나와 바닷물을 핥다가 토스트 조각에 달라붙은 아침을 끓여 먹었다는 등의 허무맹랑한 상상조차 문자 형상을 통해 구체화될 수 있다. 박상순은 이런 불가능한 배치의 미학을 통해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정신의 세계로 우리를 견인하다.

나는 누구이고 너는 누구일까? 이 시에서는 화자가 어린 시절에 겪었던 열병과 단풍이 든 풍경, 키스 직전이나 직후 입술이 갖는 붉은 이미지 혹은 불길이나 열기 같은 온도의 강도를 나타내는 단어들이 제시되고 있다. 그리고 시의 행간이 늘어나는 동안 아이였던 화자는 성인이 돼 아직 만나보지 못한 너의 입술을 모두 태워버린다. 시간의 배열도 뒤죽박죽이고 정서의 흐름도 일정한 규칙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듯하다. 한데 이런 것들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정념의 형태가 아닐까. 관념이란 설명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 그 설명되지 않는 전부를 실패하고 나서야 겨우 사랑, 슬픔, 그리움 따위 정도의 말로 축약하게 되는 것이 감정어가 갖는 관념성이 아닐까. 아직 만들어지지 않고 태어나지도 않는 시가 지금 여기에 쓰이고 있다. 그런 미래의 문법들을 오래 질투하고 있는 나를 보았던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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