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떼기’와 성완종 리스트

2015.05.13 20:51 입력 2015.05.13 20:57 수정

[정동에서]‘차떼기’와 성완종 리스트

‘성완종 리스트’ 수사가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 8일 홍준표 경남지사에 이어 이완구 전 국무총리가 오늘 검찰에 소환된다. 3000만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자리에서 물러난 지 17일 만이다. 그는 “돈을 받았으면 목숨을 내놓겠다”고 했지만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검찰은 “이 전 총리의 변명을 듣자고 불렀겠느냐”면서 혐의 입증을 자신하고 있다. 그간 수사결과를 보면 이 전 총리와 홍 지사는 검찰의 올무를 빠져나가기 힘들게 돼 있다. 리스트에 거명된 8명 가운데 1차 사법처리 대상자는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힌 셈이다.

하지만 본 게임은 지금부터다. 다음 수사대상은 홍문종 새누리당 의원과 서병수 부산시장, 유정복 인천시장이 1순위 후보다. 성 전 회장은 지난달 9일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2012년 홍문종 당시 새누리당 중앙선대위 조직총괄본부장에게 2억원을 줬다”고 밝힌 바 있다. 나머지 둘도 각 2억원과 3억원을 받은 것으로 돼 있다. 이들 셋은 이 전 총리나 홍 지사와는 급(級)이 다르다. 박근혜 정부 탄생의 1등공신이자 친박 실세들이다. 돈을 받은 2012년은 대선이 치러진 시기다. 셋은 모두 박근혜 대선캠프의 핵심요직을 지냈다. 사실상 청와대를 상대로 한 수사라는 얘기다.

시간을 거슬러 2003년 대선자금 수사로 돌아가 보자. 12년 전이나 이번 리스트 수사 모두 살아있는 권력을 상대로 한 쉽지 않은 수사다. 그때나 지금이나 새누리당이 주된 타깃이다. 2003년 대선자금 수사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은 ‘차떼기당’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LG그룹이 2.5t 트럭에 현금을 싣고 경부고속도로 만남의광장에서 트럭째 150억원을 전달한 것으로 드러났다. 수사의 하이라이트였다. 당시 한나라당이 거둬들인 불법 정치자금만 900억원을 넘었다. ‘차떼기’ 수법은 경향신문 특종 보도로 세상에 알려졌다. ‘차떼기’는 배추나 무를 심은 농민들이 돈이 급한 나머지 수확 전에 밭을 통째 중간도매상에 넘기는 ‘밭떼기’에서 착안한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차떼기 작명의 위력이 그렇게 확산될 줄을 미처 몰랐다. 이번 대선자금 수사 역시 성 전 회장의 경향신문 인터뷰가 수사의 단초가 됐다. 박 대통령 입장에서 보면 12년 만의 데자뷰다.

같은 대선자금 수사지만 사정은 정반대다. 2003년 수사는 박 대통령에겐 기회였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당 대표에 오른 그는 ‘천막당사’로 대반전에 성공했다. 박 대표는 “당사(黨舍)를 팔아 국고에 귀속시키겠다”며 여의도 공터에 천막을 쳤다. 화장실도 변변찮은 천막당사에서 두 달을 넘게 버틴 박 대표는 “50석도 힘들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그해 총선에서 121석을 건졌다. ‘선거의 여왕’이라는 이름표가 붙은 것도 이 무렵이다. 이번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이병기 대통령 비서실장이 천막당사 아이디어의 주역이라고 하니 우연이라고 하기엔 참 아이러니하다. 지난 대선자금 수사는 박 대통령이 ‘제3자’였다면 이번에는 직접 당사자다. 2012년 대선을 책임진 측근들이 일제히 수사대상에 올라 있다. 리스트에 없는 실세 정치인이 수억원의 ‘뒷돈’을 받았다는 소문도 있다. 청와대가 느닷없이 “성 전 회장의 특사 의혹도 규명해야 한다”며 물타기에 나선 걸 보면 급하긴 급한 모양이다.

검찰로 봐도 이번 수사는 위기이자 기회다. 돈을 건넨 성 전 회장이 숨진 뒤라 리스트 검증이 만만찮은 게 사실이다. 검찰 내부에서조차 “이 전 총리와 홍 지사의 공소 유지마저 쉽지 않을 것”이라는 비관론도 있다. 하지만 2003년 대선자금은 삼성·LG·현대자동차 같은 10여개 재벌그룹을 상대로 한 전방위 수사였다. 이번에는 달랑 경남기업 한 곳이라 돈 나올 구멍은 빤하다. 돈을 받은 정치인이나 액수도 이미 나와 있다. 수억원의 돈이 성 전 회장의 쌈짓돈에서 나간 것도 아니지 않은가. 비자금 조성 및 인출에 관여한 임직원들도 그대로 남아 있다. 국민 여론도 검찰 편이다. 정치권에 만연된 불법 정치자금의 검은 고리를 이번에는 손봐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결국 검찰의 수사 의지에 달린 문제다. 이명박 정부 이후 검찰은 정권 눈치보기 수사로 국민 신뢰는 입에 담기조차 민망할 정도다.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다. 공안사건은 몰라도 특수수사는 김진태 총장이 최고의 전문가다. 그는 7개월 후면 임기가 끝난다. 청와대 눈치 볼 일도 없다. 검찰이 세상 모든 고민을 혼자 끌어안고 있을 일도 아니다. 철저한 조사를 거쳐 기소하면 검찰의 임무는 끝이다. 그 뒤의 고민은 법원 몫이다. 대검 중수부 해체 이후 옛 중수부를 능가하는 막강 수사팀을 꾸린 김 총장이다. 이번 수사팀이 실력부족이라고 한다면 앞으로 검찰은 희망이 없다. 김 총장의 ‘작품’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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