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과 모욕

2015.08.10 21:27 입력 2015.08.10 21:34 수정
엄기호 | 문화학자

[세상읽기]선물과 모욕

불교 초기 경전인 빠알리경에 나오는 이야기다. 부처가 죽림정사에 계실 때 브라만인 악꼬사까가 자기 가문의 한 브라만이 부처에게 출가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처님을 찾아와서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 그 욕을 듣고 부처는 악꼬사까에게 당신의 집에 친구나 동료들이 방문하러 오는지를 물었다. 그가 그렇다고 하자 부처는 그들에게 다과나 음식을 대접하는지를 물었다. 어떤 때는 대접한다고 하자 만일 그들이 그 음식을 받지 않는다면 그 음식은 누구의 것이냐고 또 물었다. 그가 자기가 대접한 이들이 음식을 받지 않으면 그것은 자기의 것이라고 대답하자 부처는 악꼬사까에게 당신이 준 욕을 내가 받지 않았으니 그 욕은 모두 당신의 것이라고 대답했다.

부처의 이야기는 사람들 간의 유대가 만들어지는 두 가지의 길을 보여준다. 하나는 음식이나 다과와 같은 선물이다. 모스의 증여론에 따르면 선물과 증여는 세 가지 계기가 있다. 선물을 주는 것, 받는 것, 그리고 돌려주는 것이다. 선물을 받는 사람이 있어야 선물을 줄 수 있다. 그리고 선물을 받은 사람은 언젠가는 그 선물을 준 사람에게 돌려줘야 한다. 선물을 주고받고 돌려주는 것을 통해 이 두 사람 사이에는 그 시간의 길이만큼 ‘유대’가 발생한다. 그 시간의 길이가 신뢰다.

그 선물을 주고받는 것이 꼭 두 사람일 필요는 없다. 주고받는 사람들 사이의 고리도 신뢰에 따라 결정된다. 서로 유대감을 느끼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준 것이 언젠가는 나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신뢰감이 있다. 선물이 돌고 돌아 언젠가는 나에게 올 수 있다는 믿음이 관건이다. 이런 선물을 주고받는 신뢰감을 가진 고리가 상호부조의 연결망이 된다. 이것이 ‘사회’라는 걸 만드는 단초가 된다.

부처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사회를 만드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요소를 발견한다. 욕이다. 주고받고 돌려줘야 하는 선물의 반대편에 욕, 즉 모욕이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모욕을 받는다. 그러면 나는 그 사람에게 언젠가는 이 모욕을 돌려줘야 한다. 모욕을 청산하기 전까지 그와 나는 연결되어 있다. 선물의 역할을 모욕이 대신하는 것이다. 이 연결고리를 지속시키는 것은 ‘신뢰’가 아니라 ‘원한’이다. 선물을 통해 유대감을 가진 신뢰의 연결망이 만들어지는 것과는 반대로 모욕을 통해서는 원한의 연결망이 만들어진다.

모욕 또한 선물처럼 반드시 두 명 사이에서 주고받고 돌려줄 필요는 없다. 차이는 있다. 신뢰의 연결망이 돌고 돌아 나에게 오는 원형의 구조라면 모욕은 나보다 더 권력이 없는 약자에게 향한다. 직장 상사에게 당한 모욕을 직장 상사에게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부하에게 돌려주고 그 부하는 하청직원이나 커피숍에서 일하는 알바에게 돌려준다. 그리고 이 모욕은 자신도 피해자라는 이름으로 가해자가 되는 것을 정당화한다.

한국 사회는 선물을 주고받고 돌려주며 유대감을 형성하는 신뢰의 연결망으로서의 ‘사회’가 아니다. 오히려 늘 누군가에게 모욕을 당하고 살면서 반드시 누군가에게 돌려줄 기회만을 바라는 원한의 피라미드다. 그래서 모욕을 가할 기회가 있으면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나랑 상관없는 사람이라도 상관없다. 적당한 대의명분은 붙이기 나름이다. 도덕의 이름으로 가장 반윤리적인 일이 벌어지지만 이것은 모두 내가 상처받았고 그걸 돌려줘야 한다는 걸로 정당화된다. 이건 사회가 아니다. 아니 사회긴 하지만 반사회로서의 사회다.

이 반사회에서 탈출할 방법은 뭘까. 모욕을 주지 않거나 받지 않을 수 있거나 돌려주지 않으면 된다. 부처는 받지 않았다. 단 우리 모두가 부처가 아니기에 모욕을 거부하는 것은 부처와 같은 ‘현명함’이나 ‘용기’가 아닌 ‘권리’여야 한다는 점이다. 힘없는 사람 누구나 행사할 수 있는 권리일 때 비로소 모욕은 받지 않아도 되고 강제로 줄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개인에게 인내심과 용기를 요구하지 말자. 대신 권리를 주자. 차별금지법과 같은 법말이다. 지옥이 된 반사회를 넘어서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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