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고요한 불꽃놀이

2016.07.08 21:09 입력 2016.07.08 21:17 수정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생각보다 작았다. 저수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법 큰 연못일 줄 알았다. 게다가 사각형이었다. 둑이 높은 논에다 물을 담아놓은 형국이었다. 이런 데서 어떻게 불꽃놀이를 한단 말인가. 가설무대가 보이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칠 뻔했다. 무주에 사는 친구가 권하지 않았다면 무심결에 뉴스로나 접했을 무주 두문마을 낙화놀이. 해지기 전, 500년이 넘었다는 산골마을을 어슬렁거리며 낙화놀이에 대한 기대감을 누그러뜨렸다.

[사유와 성찰]세상에서 가장 고요한 불꽃놀이

저녁 무렵에는 바람이 불고 간간이 빗방울이 듣기 시작했다. 풍물패가 동네를 한 바퀴 돈 다음 연못으로 올라왔다. 소나무 숲 너머 서쪽 하늘이 검붉게 물들고 두문산 기슭은 빠르게 어두워졌다. 이윽고 연못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네 줄 철선에 불이 달리기 시작했다. 철선에 일정한 간격으로 매달린 불(낙화봉)들이 천천히 연못 저쪽으로 나아갔다.

10분쯤 흘렀을까. 모여든 사람들이 들뜬 관객으로 변했다. 누구는 탄성을 질렀고, 누구는 입을 다물었다. 아마 누군가는 소리 죽여 기도를 올렸을 것이다. 난생처음 보는 불, 불꽃, 불꽃놀이였다. 불에 대한 상상력을 뒤집는 불이었다. 상승하지 않고 하강하는 불. 하늘로 오르지 않고 바로 물로 떨어지는 불. 하나하나의 불꽃은 뜨겁지도 않고 밝지도 않았지만, 작은 불꽃 가루들이 모여 불의 춤을 추고, 빛의 노래를 불렀다.

바람을 거스르지 않는 불의 군무, 어둠을 내치지 않는 빛의 합창이었다. 해지기 전에 보았던 작은 저수지가 우주적 규모로 확장되고 있었다. 상극적 관계인 불과 물, 어둠과 빛이 상생적 관계로 어우러지고 있었다. 바람의 결에 따라 빛의 무늬를 그려내는 불꽃놀이는 어느새 신비를 넘어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카타르시스. 아마 다들 그랬을 것이다. 탄성과 환호 사이에 고요가 깃드는 순간, 저마다 오래된 소망을 중얼거렸을 것이다. 지금 곁에 없는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을 것이다. 두문마을 ‘불의 제전’은 저렇게 40여분간 계속됐다.

2년 전 여름 낙화놀이를 처음 본 이후, 나는 홍보대사를 자처했다. 에세이 원고 청탁이 들어오면 두문마을 이야기를 썼다. 큐레이터를 만나면 동영상을 보여주며 ‘이런 불꽃놀이를 본 적 있느냐’며 목에 힘을 주곤 했다. 내가 낙화놀이를 추천한 이유는 더 있다. 거기에 역사성과 장소성은 물론 공동체성과 지속성이 고루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1930년대까지 전승되어 오던 놀이를 복원한 데다, 원래 그 마을에서, 그 마을사람들이 모여 회사 형태로 운영하는 것이다.

지난해에도 무주를 찾았다. 지난여름에는 두문마을 대신 무주 읍내를 가로지르는 남대천에서 낙화놀이가 펼쳐졌다. 반딧불이 축제가 벌어지는 기간이어서 천변에는 노점들이 즐비했다. 두문마을에 견주면 스케일이 달랐다. 남대천에 가로놓인 철선의 길이가 서너 배는 더 길어 보였다. 가야금과 피리 연주가 곁들여졌다. 낙화놀이 후반부는 풍등 날리기로 이어졌다. LED 전구를 넣은 풍등 수백개가 무리를 지어 무주의 밤하늘로 솟구쳤다. 한 해 전 여름 나를 회복시켰던 고요하고 경건한 불의 제전은 아니었다.

휴가철이다. 도시적 삶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새로운 환경 속에서 나를 성찰하고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다. 이태 전 여름, 나는 두문산 기슭에서 원초적 감성을 되찾았다. 바람에 흩날리며 떨어지는 불꽃의 군무 앞에서 호모 사피엔스의 유전자가 살아 있음을 느꼈다. 불의 정화능력은 엄연한 것이었다. 한여름 밤 작은 연못이 우주의 중심으로 전환되는 신비를 경험했다. 그때 나와 우주는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온전했고, 모든 것은 모든 것에 연결되어 있었다.

최근 내가 붙잡고 있는 화두 중 하나가 영성이다. 영성은 거론하기가 쉽지 않다. 상대방이 곧바로 종교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교에 대해 중립적인, 종교를 넘어서는 영성이 있을 수 있다. 얼마 전 반가운 글귀를 발견했다. 영성지능(SQ)을 주창하는 신디 위글워즈는 말한다. “영성이란 우리 자신보다 더 큰 무엇, 신성하거나 고귀한 무엇인가와 연결되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욕구이다.” 그렇다면 누구에게나 영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태 전 나는 두문마을에서 ‘더 큰 무엇’과 만났지만 도시로 귀환하는 순간 잃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연결되고자 하는 ‘더 큰 무엇’이 무엇인지 캐묻지 않았던 것이다. 올여름에도 두문산 기슭을 찾을 예정이다. 본래의 나로 돌아가기 위해 숨을 고를 것이다. 그리고 다시 꿈꿀 것이다. 도시 안에서도, 한낮에도 신성하고 고귀한 무엇과 연결된 고리가 쉽게 끊어지지 않기를 희망할 것이다. 그래야 삶을 뒤흔드는 불확실성이 온전함과 평온함 쪽으로 조금씩 옮겨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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