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재건축 아파트, 그리고 젠트리피케이션

2016.09.04 20:49 입력 2016.09.04 20:51 수정
박해천 | 동양대 교수·디자인 연구

ㄱ씨가 봉급생활자의 굴레에서 자유로워진 것은 2008년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 기회가 처음 주어진 것은 1999년의 일이었다. 1997년 외환위기 직후 구조조정의 한파가 몰아닥쳤지만, 다행히도 ㄱ씨는 그 격변의 흐름에서 한발짝 비켜나 있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ㄱ씨는 한숨을 돌린 뒤 주식시장에 뛰어들었다. ‘바이 코리아’ 열풍이 한창일 때였다. 아파트 대출금을 갚은 뒤 고금리 적금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목돈을 주식에 투자했고, 그 돈은 몇 번에 걸쳐 상승의 흐름을 타면서 빠르게 몸집을 불려갔다. ㄱ씨는 이 돈의 투자처를 두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별별시선]강남 재건축 아파트, 그리고 젠트리피케이션

그 시점에 ㄱ씨가 ㄴ일보의 부동산 칼럼을 보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늦은 퇴근길에 들른 음식점에서였다. 그 칼럼은 1999년의 주가 상승이 아파트 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특히 2000년의 주택 공급 물량 부족이 부동산 시장의 가격 상승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꽤나 설득력있는 주장있었다. 그날 이후 ㄱ씨는 매일 그 신문의 부동산면을 챙겨보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 기사의 예측은 맞아떨어졌다. 정말로 2000년 3월부터 부동산 시장은 밀레니엄의 들뜬 분위기와 함께 회복세에 접어들었다. 외환위기 직후 530만원대까지 폭락했던 서울 아파트의 평당 가격은 600만원대에 재진입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부동산 시장으로의 이동은 당연한 일처럼 보였다. 문제는 시기였다. ㄱ씨는 재건축 대상으로 회자되던 강남 저밀도 아파트의 동향을 투자 시기를 가늠하는 지표로 주목했다. 1997년 외환위기 직후 수그러지는 듯했던 재건축의 소문은 1999년부터 다시 신문 지면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때마침 2000년 2월 중반, ㄴ일보의 부동산 칼럼은 강남의 일부 부유층이 자녀에게 증여하기 위해 개포동 주공아파트를 매입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양도세나 증여세의 기준이 되는 국세청의 기준시가가 일반 아파트의 경우 시세의 80% 수준인 반면, 이 아파트는 시세의 3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이 주목하는 이유였다. 상대적으로 세금 부담이 적었기 때문이다. ‘강남 1세대’라고 할 수 있는 1930~1940년대생 중상류층은 재건축 아파트를 통해 편법 증여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ㄱ씨는 적당한 매물을 찾기 위해 주말마다 강남 일대의 부동산중개업소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얼마 후 마음에 쏙 드는 아파트를 발견했다. 반포의 저밀도 아파트 단지였다. 중개업자에 따르면 25평 아파트의 시세는 2억8000만~3억5000만원 선, 전세가는 25평이 9000만~1억원 선이었다. ㄱ씨는 강남의 역사를 다룬 손정목 선생의 글을 챙겨 읽었던 터라, 이 아파트 단지가 1970년대 중반부터 예비 중산층에게 내집 마련의 기회이자 강남으로의 진입로 구실을 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고층 아파트가 세워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재건축 아파트는 일단 강남으로의 진입로를 봉쇄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건설사와 조합원의 이익을 모두 고려해야 하는 터라 중대형 아파트 위주로 높은 분양가가 책정될 것이고, 그 분양가는 다시 주변 아파트의 시세를 끌어올릴 것이다. 그리고 이런 연쇄반응은 강남 아파트의 가격을 상향조정하면서 진입장벽을 이전보다 훨씬 높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그렇다면 한강변을 따라 반포에서 잠실까지 이어진 대규모 아파트 단지들은 일종의 폐쇄형 주거지역으로 진화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상황 전개는 강남의 미래에 대한 청신호나 다름없었다. ㄱ씨는 주저 없이 반포의 아파트를 매입했다.

ㄱ씨의 바람대로 타워형의 재건축 아파트들이 완공된 것은 2008년 가을의 일이었다. 평당 분양가는 3000만원을 훌쩍 뛰어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점에 ㄱ씨가 다음 투자처로 강북 번화가의 상업용 부동산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단어가 그리 익숙지 않은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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