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등 켜는 공무원

2016.09.18 20:54 입력 2016.09.18 20:57 수정
정지은 | 문화평론가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에는 신기한 직업이 있다. 바로 가스등의 불을 켜고 끄는 일이다. 자그레브 구시가지(Upper city) 내 건물에 달려있고, 번호가 부여돼 있는 이 가스등들은 일일이 수작업으로 불을 붙이고 꺼야 하는 옛날 가로등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전기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200여개에 달하는 구시가지 내 가스등 전부의 불을 밝히고, 끄러 다니는 사람들이 따로 있다고 한다. 그게 직업이라는 것도 신기한데 심지어 공무원이란다.

[별별시선]가로등 켜는 공무원

오래된 도시를 구석구석 돌면서, 긴 막대기로 가스등의 불을 하나하나 직접 밝히고, 끄는 직업이라니! 2인 1조로 다닌다는 그분들은 번호만 말해도 그 가스등이 어느 건물에 붙어있는지 알 테고, 매일매일 도시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샅샅이 파악하고 있을 테다. 자동으로 켜졌다 꺼지는 현대식 가로등보다 비효율적일지는 몰라도, 꽤 낭만적이지 않은가. 비 오는 날 구식 가스등이 만들어내는 빛이 어우러지는 오래된 도시의 풍경은 그 자체만으로도 매력적이다. 이 옛날 가스등은 관광이 중요한 수입원인 크로아티아에서 제공하는 볼거리면서, 중세의 풍경을 즐길 수 있는 구시가지만의 매력을 한층 더하는 아이템으로서의 가치도 충분하다. 만약 자그레브 구시가지의 가로등이 최신식이라면, 어디에도 없는 번호 붙은 구식 가스등이 만들어내는 도시의 풍경과 하나뿐인 직업의 이야기도 사라질 테다.

한국에 이런 직업이 생긴다면 어떨까. 친척들이 “취직은 했니?”라고 물으면 “가로등을 켜고 끄는 일을 하고 있어요”라고 답하는 대신 “공무원 됐어요”라고 대답하지 않을까. 한국에서는 “삼성 다녀요”, “선생님입니다”처럼 한 문장으로 설명 가능한 직업이 아니면 인정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뭐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길어지면 일단 불합격이다. “그거 해서 먹고살겠나”와 ‘알 만한 기업’을 다니느냐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그 사람이 행복한지, 삶에 만족하는지는 아무도 물어보지 않는다. “그림 그리고 글씨도 쓰고 이것저것 합니다.” 아무리 설명해도 늘 “뭐 하는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만 듣는다며 괴로워하던 친구 하나는 전략을 바꾸더니 얼굴이 폈다. “먹고살 만합니다”라고 대답하면 만사 오케이라나.

대기업에 들어간다고 삶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대졸 신입사원의 1년 내 퇴사율이 27.7%라는 통계를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이,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제주 이민’이라는 신조어가 생길 만큼 제주로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덕후 투어’만 기획하는 여행사, 지리산 자락에 식당을 차린 청춘들, 한 달에 한 도시씩 24개국으로 신혼여행을 떠난 부부도 있다. ‘직장’을 다닌다고 ‘직업’이 생기는 게 아니라는 현실을 일찍 깨닫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아직 대세는 아니다. 대학 나와서 백수가 되느니 일찍부터 9급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고등학생(고딩), ‘공딩족’이 등장할 정도로 안정적인 직업에 대한 선호도는 여전하다. 하지만 살펴보면 ‘남들 다 가는 길’은 정답이 아닌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전화번호를 ‘오리구이’와 소리가 비슷하게 ‘5292’를 많이 쓸 정도로 유행했다는 오리구이집을 비롯해 찜닭 전문점, 조개구이집, 닭강정집 등이 우후죽순 생겨났다가 어느새 없어져 버린 것처럼 말이다.

‘안정적인 일자리’가 절대 과제라고 한다. 하지만 저성장 시대인 지금, 안정적인 일자리는 창출하기도 어렵고, 그 일자리가 언제까지 안정적일지 아무도 보장할 수 없다. 오히려 정규직으로 살지 않아도 기본적인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도록 사회안전망을 만들고, 다양한 직업과 삶의 방식을 인정하는 것이 훨씬 빠른 길이다. 크로아티아의 ‘가로등 켜고 끄는 공무원’처럼, 매력적이면서 지속 가능한 틈새들이 한국 사회에는 더 많이 필요하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