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식’이 통용되는 시대

2016.10.16 21:10 입력 2016.10.16 21:16 수정
정지은 | 문화평론가

온 나라가 최순실(최서원)을 둘러싼 설왕설래로 들썩인다. 여러 가지 의혹이 쏟아지고 있지만, 가장 흥미롭게 지켜봤던 부분은 바로 재단 설립 인허가 과정이다. 재단법인 설립이 허가되기까지 평균 21.6일이 걸린다는데, 미르재단은 5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과정 또한 드라마틱하고 비현실적이다. 실무자가 세종시에서 서울까지 출장 가서 서류를 받고, 저녁 8시7분에 기안을 올린다. 8시10분에 사무관이, 8시27분에 과장이 원격 결재를 한다. 실시간 결재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속도인데, 결국 윗사람이 기다렸다는 이야기가 된다. 문체부 고위공무원의 저녁 시간을 정지시킬 수 있는 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누군가의 시간을 컨트롤할 수 있는 힘, 그것이 바로 권력의 힘이다. 사람들이 권력을 갖고 싶어 하는 것도, 돈을 많이 벌려고 하는 것도 생각해보면 타인의 시간을 사거나 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회사에 매인 시간’에서 벗어나고 싶어서니까.

[별별시선]‘비상식’이 통용되는 시대

회사를 다니고 월급을 받는다는 건 결국 누군가가 원하는 일을 하면서 보내는 내 시간의 대가다. “월급이란 젊음을 동대문 시장의 포목처럼 끊어다 팔아 얻는 것이다. 월급을 받을수록 나는 젊음을 잃는다. 늙어간다. 가능성과 원기를 잃는 것이다. 존재가 가난해진다.” 이혁진의 소설 <누운 배>에 나오는 구절이다. 실제 직장을 다니다가 그만두고 소설을 썼다는 작가의 글이라 그런지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최근 읽은 소리꾼 이자람의 인터뷰가 겹쳐 떠올랐다. “관객과 함께 만들어가는 러닝 타임 동안의 여행, 이것이 공연자로서 제 삶의 전부일 것 같은데요. 제 삶은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하는 시간들로 쌓여가는 것 같습니다.” 읽는 순간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자신의 삶과 시간을 어떻게 꾸려나갈지 정하고 그 길에서 매진하고 있는 사람 특유의 겸손하지만, 단호한 느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공연자 자신조차 오롯이 무대 위의 시간을 위해 쓰겠다고 작정하고 준비해 만드는 예술가의 작품, 그리고 그 작품을 만들어내는 예술가의 시간들은 얼마나 촘촘하고 단단하게 구성되어 있을까?

직장을 다니다가 전업 작가로 돌아선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전에는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불안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선택을 감행한 그들의 용기가 부럽고, 한 번도 결단하지 못한 채 조직에 머물러 있는 내가 비겁하게 느껴진다. 그들은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할 수 없고 얻을 수 없는 것을 위해,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결단을 내린 사람들이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고 말하는 그들이 부럽지만 어쩌겠는가. 선택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이 있기 마련이고 결국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에 대한 선택과 그 결과는 본인의 책임이다.

물론 개인의 시간이 개인 한 사람만의 책임만은 아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할 책임은 분명하다. 후속 세대가 누리고 영위하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그 일상의 시간과 사회의 공기를 바꾸는 일이기 때문이다. 당장 민주정부 10년 시기에 20대를 통과한 나와 이명박근혜 정부 시절에 20대를 보낸 후배들만 비교해 봐도 차이가 확연하다. 비상식이 상식처럼 버젓이 통용되고, ‘블랙리스트’가 돌아다니는 시대 분위기에서 과연 자기 검열에 자유로운 사람이 몇이나 될까? 보고 듣고 느끼며 공기처럼 흡수한 동시대 시간의 영향력이 놀라운 이유다. ‘나는 비로소 내가 될 테지만 그 나는 얼마나 보잘것없을까.’ 소설 <누운 배> 속 구절을 다시 읽으며 내게 묻는다.

나는 내 시간을 무엇으로 보내고 있는가? 그 시간으로 이뤄진 나는 누구일까? 내가 듣고 보고 읽고 만나고 호흡하는 이 시대를 위해 나는 무슨 일을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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