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길, 세종로

2016.12.29 21:07 입력 2016.12.29 21:20 수정
전우용 역사학자

도시는 권력이 설계하고 구현한 특별한 공간이다. 인간은 문명 발생의 여명기부터 자기 공동체가 이룬 경제적 문화적 성과를 증명하는 물질들과 그를 통제, 지배하는 권력을 한 곳에 집중하고 저장하는 행위를 거듭해왔다. 이리하여 도시, 특히 으뜸가는 도시인 수도(首都)는 그 외형만으로 국가 공동체의 문명적 성취와 정치적 지향을 표상하는 구조물들의 집적체가 되었다.

[시대의 창]시대의 길, 세종로

한 국가의 실질적, 상징적 중심이 수도라면, 수도의 중심은 최고 권력자의 거소(居所)다. 고대 로마 이래 유럽 도시들에서는 신전과 정청(政廳), 법원 등으로 둘러싸인 포럼(Forum), 즉 광장이 도심부의 기본 형상이었다. 광장은 그 도시가 단일한 신을 섬기는 종교적 공동체이자, 단일한 법체계와 행정 질서로 통합된 정치적 공동체임을 표현하는 공간이었다. 반면 유교 국가의 수도 조영 원칙을 제시한 <주례>는, 왕궁 정문에서 도시의 정문으로 뻗은 대로에 권력의 의지와 지향을 직관적으로 표현하도록 했다. 유교적 이상 국가를 표방하고 건국한 조선왕조도 이 원칙에 따랐다.

정궁인 경복궁에서 남쪽으로 뻗은 길은 ‘국중(國中)의 대로’로 가장 넓게 조성되었는데, 이 길 위에서 북쪽을 향해 섰을 때 시야에 들어오는 하늘, 산, 왕궁의 위계는 그 자체로 천신과 산신의 가호를 받는 왕권을 상징했다. 또 길 좌우에는 의정부, 삼군부, 육조 등의 관아 건물들이 배치되어 왕 앞에 시립한 만조백관을 표상했다. 조선시대 경복궁 앞길은 곧 ‘어전(御前)’이었고, 조선 전역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였다.

한국을 강점한 일본 제국주의도 이 장소의 상징성에 주목했다. 그들은 경복궁 전각 대부분을 헐고 그 앞에 르네상스 양식의 웅대한 총독부 건물을 지었다. 이는 곧 조선 전래의 가치와 이념을 붕괴시키고 그 자리를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치 이념으로 채우는 통치방침과 등치되는 행위였다. 일제는 또 광화문을 다른 곳으로 옮겨 놓고도 그 앞길에는 ‘광화문통’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름만 남고 실체는 사라진 광화문은, 주권을 잃은 채 이름만 남은 ‘조선’의 상징이 되었다.

해방 후 총독부 청사는 군정청 중앙청사가 되었고, 1946년 초부터 ‘중앙청’으로 불렸다. 1946년 서울시 가로명제정위원회는 ‘광화문통’을 ‘세종로’로 개칭했다. 세종 같은 군주가 거듭 나와서 좋은 정치를 펼쳐 달라는 염원을 담은 이름이었다. 하지만 바뀐 것은 이름뿐이었다. 이후 수십 년간, 일본 제국주의가 조성한 물리적 공간 위에 대한민국의 이념과 지향을 표현하는 어색한 동거의 시대가 지속되었다. 1960년대 중반까지 이 길 초입에는 늘 ‘잊지 말자 일제 침략’이나 ‘상기하자 6·25’ 등의 문구를 적은 국정 홍보용 구조물이 서 있었다.

1968년, 세종로 입구에 충무공 동상이 섰다. 동상 건립 주체였던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는 애초 세종로에 세종대왕, 충무로에 충무공, 을지로에 을지문덕, 퇴계로에 이퇴계 등 가로명에 맞춰 동상을 배치하려 했으나, 박정희 대통령은 무장(武將)으로 하여금 국가 상징가로를 대표하게 했다. 이로써 세종로는 호국안보를 제일의 가치로 삼는 병영국가의 표상이 되었다. 1995년 구조선총독부 청사가 헐리고 2009년 차로로 둘러싸인 광화문 광장에 세종대왕 동상이 추가로 놓임에 따라 이 거리의 무단성과 위압성은 줄어들었으나, 대신 중세 왕조시대의 ‘선정(善政) 이데올로기’가 점하는 비중이 커졌다.

국가권력이 전시되는 공간이었던 경복궁 앞길은 국혼(國婚), 국상(國喪), 박람회, 경축 퍼레이드 등의 국가적 행사 때면 일시적으로 시민에게 개방되곤 했다. 그러나 이때의 시민은 동원된 단역배우이거나 관객이었을 뿐, 주역은 아니었다. 불의한 권력에 항거하는 시민이 자발적으로 이 거리를 점거한 것은 1960년 4·19 때가 최초였다. 촛불이 처음 등장한 것은 2002년 효순·미선 추모집회 때였다. 이후 이 거리의 촛불은 평화적인 ‘한국형 시민혁명’의 상징물이 되었다.

지난 반세기 남짓한 기간 동안, 세종로는 단절적이면서도 연속적인 시민혁명의 중심지였다. 이 길에 ‘국가상징가로’라는 불필요한 별명을 붙이자는 제안이 처음 나온 것은 김영삼 정권 때였고, 그 제안이 실현된 것은 이명박 정권 때였다. 그 이후 이 길의 모양을 바꾸려는 시도들이 거듭되었으나, 그 한복판에 자리 잡은 상징물들은 여전히 중세적이다. 이제는 이 길 위에 누적된 명예롭고 평화적인 ‘시민혁명’의 역사를 보존하고 전승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대한민국은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영웅인 나라, 불의한 권력을 용납하지 않는 나라여야 한다. 역사적인 국가상징가로도, ‘시민혁명’의 정신을 담는 공간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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