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유착과 코포라티즘

2017.03.27 21:17 입력 2017.03.27 21:25 수정
황대권 | 생명평화마을 대표

[황대권의 흙과 문명]정경유착과 코포라티즘

현직 대통령을 탄핵사태로 이끈 이른바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의 핵심은 ‘정경유착’에 있다. 역대 모든 정권, 아니 민주주의가 확립되어 있다는 선진국에서조차 정경유착은 피할 수 없는 딜레마이다. 정권을 쥔 자는 사회를 주도하는 기간세력과 손을 잡지 않으면 제대로 힘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황대권의 흙과 문명]정경유착과 코포라티즘

근대 이전에 대중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회세력은 종교였지만 자본주의가 확립된 이후로는 기업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인류는 아주 오랜 세월을 종교와 정치가 하나였던 제정일치 사회에서 지내다가 왕권이 우위를 확보하고부터는 제정유착 사회로 이전한 뒤 지금은 정경유착 사회를 살고 있다. 정경유착이 정상인 시대에 그로 인해 탄핵을 당하다니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랫동안 기득권 속에서 살다보니 현실의 법이 거꾸로 자신들을 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급기야 그들은 탄핵은 불법이라며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길거리로 뛰쳐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성조기를 보고 미친 거 아니냐며 지나치고 말았지만 내게는 이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우리 뒤에 미국이 있다”는 암시 치고는 성조기의 사이즈가 너무도 컸다. 4차선 도로를 완전히 뒤덮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다가 박영수 특검이 박근혜와 최순실의 관계를 ‘경제공동체’로 규정하는 것을 보고 비로소 일련의 사태가 정리되었다.

둘 사이의 관계는 법률용어로 정확히 ‘공동정범’이다. 그냥 쉽게 말해 ‘공범’이다. 그러나 특검은 대통령을 예우한다는 차원에서였는지 범죄냄새가 나지 않는 경제용어를 선택하였다. 역사행위의 주역들은 때때로 본의 아니게 ‘실수’를 통해 사태의 진면목을 드러내기도 한다. 대한민국 극우세력들은 ‘안보’를 수단으로 하여 미국의 주도 아래 정경일치 사회를 획책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미국과 극우정부와 재벌의 관계는 특검이 규정한 대로 ‘경제공동체’이다.

이들이 이러한 일치사회를 선택한 이유는 자신들의 이익을 항구적으로 유지하면서 북녘의 ‘군정일치’ 사회에 대적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체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는 현대의 일반적인 조건에서는 불가능하지만 분단상황 아래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 맘먹으면 가능할 수도 있다는 것이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그런데 최순실이라는 희대의 ‘민간인’이 나타나 이 모든 구도에 균열을 내고 말았다.

박근혜의 비극은 전적으로 민간인 최순실에 기인한다. 최순실이 없었다면 박근혜가 대통령으로서 아무리 자질이 없고 무식해도 탄핵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헌법재판소의 판결문에도 고스란히 나와 있다. 헌재 재판관들은 촛불시민들이 요구하는 수많은 탄핵 사유 가운데 오직 하나, 뇌물수수만 가지고 탄핵을 인용했다. 대통령이 임명한 재판관들조차 정경유착을 진두지휘한 민간인 최순실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대한민국 권력집단의 독특한 사고방식을 읽어볼 수 있다. “권력자가 해먹는 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자가 해먹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뇌물죄로 신문 머리를 장식한 수많은 정치인과 재벌기업가들이 솜방망이 처벌을 받은 이유이다. 민초들이야 대통령의 독재와 무능, 불통, 몰인정에 치를 떨며 탄핵을 요구했지만, 관료집단은 자격 없는 민간인이 국정을 농단하도록 방조한 대통령에 대해 만정이 떨어진 것이다.

대한민국의 부패구조와 만성적인 정치불안은 바로 이 언저리에서 발생한다. 각종 자격증과 인허가증을 가진 자들이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자기들끼리 정보를 주고받으며 상부상조한다. 사회 각 부문에 포진하고 있는 ‘○○마피아’가 그것이다. 물론 똑똑한 그들은 법망을 피하기 위해 자격증을 갖춘 최고의 법률가들을 고용한다. 가진 자들에게 법이란 피해 가라고 있는 것이지 지키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만의 리그’에는 정치와 경제 부문을 핵으로 사회 각 부문의 상층부가 종횡으로 얽혀있다. 여기에 대규모 노동조합 간부들까지 가세하면 드디어 ‘한국적 코포라티즘’이 완성된다.

코포라티즘(corporatism)은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익집단이 서로 결탁하여 일종의 과두지배체제를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현재 근로시간단축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노사정위원회가 코포라티즘의 초보적 형태이다. 독재시절엔 정부와 기업체 간의 정경유착만으로 충분히 국가를 운영할 수 있었으나 노동조합의 힘이 커지면서 이들도 협상 테이블에 끌어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코포라티즘은 정경유착 체제가 불러올 수 있는 정치불안에 대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한국의 보수정치인들에게 꽤나 매력적인 정치체제이다. 기존에 추구하던 착취와 성장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정치적 안정까지 얻을 수 있으니 말이다. 서구 선진국에서는 국가와 이익단체들 간의 민주적 합의를 중심으로 운영한다고 하지만 권위주의 체제인 한국은 아무래도 국가주도일 수밖에 없다.

탄핵사태에 힘입어 곧 있을 대선에서 야당이 손쉽게 정권을 가져갈 것으로 예상되지만 정권이 바뀌더라도 국가주도의 코포라티즘 구조는 변함없이 유지될 것이다. 대선주자들은 저마다 정경유착의 뿌리를 잘라내겠다고 공언하는데 그것은 선거국면의 립서비스에 지나지 않는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진보적이었던 노무현조차 취임 후 2년 만에 재벌총수들 앞에서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한국 정치의 딜레마인 정경유착을 끊어내고 새로운 민주국가로 나아가는 일은 촛불집회에서 드러난 직접민주주의 요소를 어떻게 제도화하느냐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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