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일수공책을 쓸 때다

몇 년 전 외국 활동가들에게 한국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소개할 일이 있었다. 강연을 준비하면서 여러 영상자료들을 연표 순으로 정리해서 보았다. 그야말로 사람을 울컥하게 만드는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문득 역사 속 우리의 희망과 절망이 참으로 섣부른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세의 부침 속에서 정세보다 크게 들뜨고 정세보다 빨리 좌절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물론 역사의 연표를 쥔 후세의 사람이 역사적 사건 속에서 절규하는 사람의 태도를 평가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1980년 ‘오월 광주’를 아는 눈으로 그 몇 달 전 ‘서울의 봄’에 대한 기대로 들뜬 사람들을 보는 것은 괴롭지만 그렇다고 미래에 대한 그들의 무지를 탓할 수는 없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이미 일어난 일로 볼 수 있는 존재는 신이거나 후세의 역사가뿐이다.

[고병권의 묵묵]지금은 일수공책을 쓸 때다

최근 일들만 해도 그렇다. 불과 1년여 전만 해도 여당이 총선에서 개헌선을 확보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박근혜 전 대통령은 수감되었고 조금 있으면 새로운 대통령이 탄생한다. 만약 미래를 알았다면 우리가 헛된 희망과 불필요한 절망에 빠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무지는 우리가 제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 반대 방향이다. 무지 때문에 생겨나는 희망과 절망이 아니라 희망과 절망 때문에 생겨나는 무지 말이다. 그리고 이 무지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났거나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것이다. 희망과 절망에 빠져 있으면 과거를 제대로 기억하지 않고 현재를 주의 깊게 살피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미래에 대해서는 섣불리 판단한다. 그런 식으로 현실을 회피하는 것이다. 똑같은 사람에게 상반된 두 감정이 교차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희망에 도취된 사람일수록 절망에 취약하고 절망이 커질수록 헛된 희망을 찾아나서기 십상이다.

스탕달은 철학자와 은행가는 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했다. 훌륭한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은행가처럼 환상 없이 실상을 냉정하게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훌륭한 민주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돈에 대한 속물적 집착이 혐오스럽기는 하지만, 돈 빌려준 곳을 정확히 적어두고, 감정에 휩싸여 자기 이익을 놓치는 일이 결코 없는 대부업자에게는 배울 만한 구석이 있다.

나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불과 몇 개월 전의 촛불집회인데도 벌써 오래전의 일처럼 아득하다. ‘이게 나라냐’는 절망은 절망했다는 사실로만 남아 있고, ‘정권교체’라는 희망은 그저 들떠 있는 감정뿐인 것은 아닌지. 일수공책에 적어둔 것이 없으니 이러다가 이자는 고사하고 원금까지 떼이게 생겼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일수공책을 써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지난 몇 년 동안 적어둔 게 없다면 지난 몇 개월 치라도 기억나는 대로 적어 둘 필요가 있다. 우리가 무엇을 견딜 수 없었는지, 우리가 무엇을 외쳤고 무엇을 들었는지, 우리는 어떻게 싸웠는지, 그때의 분노도 적고, 투지도 적고, 다짐도 적고, 웃음도 적어두어야 한다. 그래야만 새로운 집권자와 민주주의의 대차대조를 해볼 수가 있다.

지금은 민주주의 운동의 시야가 선거운동으로 극도로 좁혀져 있는 시점이다. 내가 미는 후보를 당선시키는 것이 한국 사회를 민주화시키는 길이라는 믿음이 가장 강한 때이고, 후보들 역시 자기의 기억과 의지를 모두의 것으로 확신하는 때이다. 우리의 지배자가 된 충동이 우리의 경험에 대한 해석의 전권을 얻듯이, 새 집권자는 촛불집회의 원인과 과정에 대한 기억을 상당부분 장악할 것이다. 일수공책이 없다면 그는 우리에게 이자를 갚기는커녕 빚 갚으라는 독촉장을 내밀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승리자에게 완전한 믿음을 주는 일은 삼가야 하며 그를 독촉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민주주의에 관한 한 지도자로 선출된 이는 채무자라는 사실을 채권자가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언제든 승리에 도취된 그를 깨울 찬물 한 바가지를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나도 일수공책에 하나 적었다. 지난 4월21일, ‘장애인차별철폐의 날’ 행진에 나섰던 우리는 대구시립희망원에서 일어난 끔찍한 일에 항의하며 대선후보자들의 당사를 찾았다. 희망원은 대구시가 설립한 수용시설로 천주교 대구대교구가 위탁운영을 했던 곳이다. 이곳에서 지난 6년간 무려 309명의 수용자들이 사망했고, 그중 최소 29명이 국가인권위원회 조사결과 의문사를 당했다. 어떻게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느냐고 운영자만을 욕하는 사람들은 장애인들을 격리시켜 수용하는 시설자체가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는 모르는 사람들이다. 유력 대선후보들의 캠프 인사를 만난 우리는 공약집에 ‘대구희망원 장애인 수용시설의 즉각적 폐쇄’와 ‘장애인 탈시설 정책 추진’을 적어 넣을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그제 대구시에서 희망원의 장애인수용시설을 내년까지 폐쇄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일단 이자 일부를 받아낸 셈이다.

지난 6년간 309명의 사람들이 죽어간 희망원 홈페이지에는 “생활인들에게 ‘새삶’의 목표를 지향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 위에 서비스의 차별성을 더한 감동을 창출”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말과 현실의 격차란 게 이런 것이다. 그러니 후보들 공책에 적힌 말만을 읽고 들떠서는 안된다. 지금은 냉정하게 내 공책에도 뭔가를 적을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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