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강요하는 ‘성교육 표준’

2017.05.21 21:10 입력 2017.05.21 21:11 수정

“스무 살부턴 뽀뽀할 수 있는 거죠? 성관계는 무조건 안돼요. 여성가족부는 너무 여성 중심이죠? 성폭력은 남자에게 불리하대요. 맨날 똑같은 성교육만 받아요.” 발달장애 청소년들을 상대로 성교육을 할 때 간혹 듣는 이런 의견은 복잡한 고민을 던져준다. 이상하거나 잘못된 질문이라서가 아니다. 발달장애 청소년의 말은 우리 사회를 반영한다. 그러나 ‘표준의’ 삶을 중심으로 구성된 성교육은 이들의 의견과 질문에 대답할 능력이 없다. 그 빈자리를 채운 발달장애인을 향한 통제와 금지 중심의 성교육이 얼마나 강력한지 새삼 깨닫는 순간이다.

[NGO 발언대]국가가 강요하는 ‘성교육 표준’

2015년 2월 교육부가 6억원을 들여 연구해 발표한 ‘국가 수준 성교육 표준안’은 국제적 인권기준에 위배되며, 청소년 성문화 현실과 성교육 현장의 의견을 무시한 데다 금욕 강요, 비과학적 정보, 성차별 강화, 성소수자 배제 등 인권침해적인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교육부는 지난해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 정책 연구를 의뢰하고 형식적인 공청회를 거친 후, 올 초 일부 내용만 수정하여 배포한다고 발표했다. 일부에선 교사 대상 직무교육을 기획·진행하고 있다.

교육안은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남성과 여성으로 분리되어 있음’을 전제로 시작한다. 그리고 ‘(성폭력 예방을 위해) 이성친구와 단둘이 있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다. 동성애, 성적 소수자에 대한 지도는 허용되지 않는다. 만원 지하철에서 성폭력을 경험하면 실수인 척 발등을 밟는다. 청첩장 쓰기, 건전한 이성교제와 배우자 되기, 결혼과 출산, 양육하기’ 등의 내용으로 이어진다. 이로써 인간의 표준은 남성과 여성이 되고, 이성애 결혼과 출산, 양육을 통한 부모 되기가 삶의 전형으로 그려진다. 초·중·고 10대 전체 청소년이 공교육 현장에서 받게 될 성교육에 정작 10대 당사자와 장애 청소년, 성소수자 청소년 등 소수자들의 삶과 경험은 반영되지 않았다. 평등과 인권의 가치로 채워져야 할 교육이 배제와 차별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성교육 표준안은 마치 사회적인 통념과 성규범을 체계화한 것으로 보인다. 다양한 몸, 정체성, 경험과 욕구를 가진 사람들의 경험은 이렇게 자연스럽게 제거된다. 국가가 ‘표준적’ 삶을 강요하는 것이다. 표준적 삶과 성의 모델을 국가가 성교육을 통해 제시하면, 그렇지 않은 삶을 사는 사람들은 비정상화될 수 있다. 비정상과 비규범은 무질서와 혼란으로 여겨지고, 혐오와 차별의 명분이 되기도 한다.

지난 5월17일엔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 피해자 1주기 추모제와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IDAHO·아이다호데이) 기자회견과 ‘필리버스킹’이 있었다. 그리고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은 ‘국가 수준의 학교 성교육 표준안 폐지와 인권과 성평등의 관점에서 포괄적 성교육 실시’를 위한 1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심화되는 여성과 성소수자를 향한 혐오와 폭력, 장애인 등 소수자의 성적 권리를 통제하는 현실은 ‘국가 수준 성교육 표준안’ 문제와 분리되지 않는다. 성교육을 통한 표준의 강요는 자신만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기 어렵게 만들고,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는 관계 맺기를 배울 수 없는 삶으로 국가가 내모는 것이다. 불안과 실패한 삶에 대한 분노는 결국 사회와 약자를 향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표준의 삶’을 강요하는 성교육을 거부하는 것은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다. ‘국가 수준 성교육 표준안’을 즉시 폐지하고, 성평등을 위한 교육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지 다시 논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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