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사회

2018.03.22 20:50 입력 2018.03.22 20:57 수정

[세상읽기]좀비 사회

2016년 개봉한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서울역>(사진). 이 영화는 한국 경제 성장의 ‘종착역’이 어디인지 정확히 보여준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아버지가 제대로 역할을 못하게 되면 어린 딸이 돈을 벌기 위해 ‘집’을 떠난다. 낮은 노동가격을 지닌 딸이 현실적으로 갈 수 있는 곳은 성 노동시장이다. 열악한 성 노동에 시달릴 때 한 남자가 나타나 위로한다. 그는 딸이 성 노동에서 빠져나오도록 도우면서 남자친구가 된다. 하지만 돈을 벌어 여자친구를 부양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녀를 원조교제로 내몬다. 남자친구와 포주가 한 모습이다.

딸은 ‘남자친구-포주’에서 벗어나 다시 집 밖으로 나서지만 세상은 이미 좀비 일색이다. 누구나 좀비에게 물려 피 빨리면 또 다른 좀비가 된다. 딸은 좀비에게 물리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도망치지만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다.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물대포가 날아오고, 군인에게 기대면 총알이 빗발친다. 국가는 좀비를 피해 생존을 추구하는 국민을 좀비에게 감염되었을지도 모를 유사좀비로 취급한다.

이제 마지막 남은 보루는 집이다. “저, 집에 가고 싶어요. 집 나오고 무서운 사람만 만났어요.” 딸은 바들바들 읊조린다. 애초에 왜 집을 뛰쳐나왔지? 집에서 빚을 지워줬기 때문이다. 안전하게 보호도 못하면서 빚을 지워주는 집. 그런 집일망정, 좀비에 물릴 바에야 그곳이라도 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집에는 평생 ‘착하게’ ‘바르게’ ‘성실하게’ 근로만 했을 병든 아버지가 누워있다. 그나마도 이젠 빚쟁이에게 쫓겨 도망가고 없지만.

딸은 좀비를 피해 간신히 어떤 집으로 숨어든다. 공교롭게도 재개발 신축아파트 ‘모델하우스’다. 한숨 내려놓고 쉬고 있는데, 수소문 끝에 집 나간 딸을 찾아 아버지가 이곳으로 온다. 아, 아버지! 희미한 실루엣을 뚫고 나타난 아버지. 하지만 그는 딸이 일하던 업체의 포주다. 아버지와 포주가 하나다. 보호해주지도 않으면서 아버지 행세를 하며 몸을 팔아 이윤을 남기라고 강요한다. 좀비로 변해가기 시작한 딸은 ‘아버지-포주’를 물어뜯는다.

이는 사실 ‘국가-포주’를 물어뜯는 것과 마찬가지다. 좀비를 피해 도망쳐온 생존주의자를 지켜줄 줄 알았던 국가가 오히려 물대포와 총을 내갈긴다. 보호해주지도 못하면서 평생 근로만 하라고 강요하는 국가. 국가는 국민을 좀비, 유사좀비, 생존주의자로 편 갈라서 물리적으로 지배한다. 극소수의 성공주의자들만 국가가 쌓아올린 산성 안에서 안전을 누리며 살고 있다.

한국인은 지난 반세기 이상 가족과 국가의 성장을 위해 죽어라 노동만 해왔다. 그 결과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은 세계 경제 10위권으로 우뚝 올라섰다. 그런데 국민 다수가 비정규직이나 외주업체 노동자와 같은 좀비나 유사좀비로 전락했다. 운이 좋은 사람은 더러 무기 계약직과 같은 생존주의자로 남았지만 좀비에게 물리는 건 시간문제다. 이를 피한답시고 집 안에만 머물러 있다가는 아버지-포주-좀비에게 물어뜯길 수 있다. 좀비 사회, 이 처참한 메타포는 지금까지 한국인이 믿고 의지해왔던 친밀성 제도(家)와 공적 국가 제도(國)가 사실상 딸을 팔아먹는 ‘가부장적 포주-좀비’였다는 기막힌 사실을 폭로한다.

[세상읽기]좀비 사회

바야흐로 헌법 개정 논의가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권력분산이나 지역균형발전, 물론 중요하다. 그럼에도 가족과 국가의 성장을 위해 죽어라 노동만 하다 좀비로 전락한 기성세대와 이제 노동시장에 들어가자마자 좀비에게 물리도록 예정되어 있는 청년세대를 두루 살펴야 한다. 무엇보다도 ‘국민 성장’이나 ‘지속가능한 성장’을 들먹이며 여전히 가족과 국가의 ‘성장’을 최고의 가치로 놓는 가족주의와 국가주의를 폐기해야 한다. 대신 누구나 ‘자신의 좋은 삶’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이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삶을 기획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개인주의’를 헌법의 가치로 분명히 새겨 넣어야 한다. 가족과 국가는 맹목적으로 따라야 할 절대 가치가 아니라 개인주의를 적극적으로 실현시켜주는 ‘좋은 제도’여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밝혀야 함은 물론이다. 좋은 제도 아래에서만 개인의 좋은 삶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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