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보수

2018.05.14 21:24 입력 2018.05.14 21:25 수정
박민규 | 소설가

[박민규 칼럼]꽃보다 보수

니콜라이 프세블로드비치 스타브로긴, 니콜라이 프세블로도브나 스타브로기나,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카라마조프…. 러시아 소설을 읽기가 참으로 난감했던 이유는 등장 인물의 이름 때문이다. 캐시어스 클레이라는 한 흑인 복서는 자신이 백인 농장주의 성을 딴 노예의 이름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 스스로 개명한다. 훗날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복서로 선정된 그의 이름은 무하마드 알리다. 작고한 뮤지션 프린스는 한때 자신의 이름을 기호화된 심벌로 개명한 적이 있다. 부를 수는 없고 그릴 수만 있는 이름이었다.

[박민규 칼럼]꽃보다 보수

명사는 ‘쎄다’. 정말 강력하다. 평창 올림픽 기간 중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뉴스는 낙지와 오징어에 관한 것이었다. 명사를 반대로 쓴다는 것, 즉 북한의 낙지가 우리의 오징어고 우리의 낙지는 북한에서 오징어란 사실이다. 먼 훗날 어쩌면 남북 통일의 최후 과제는 낙지와 오징어일 수도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겐세이, 기스, 오뎅…. 7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쓰이는 일본어들이 많다. 국민의식의 문제가 아니라 명사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듯 명사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이름 가지고 장난치지 말라는 말도 그래서 나온 말일 것이다.

한국 현대사의 수많은 비극도 실은 명사에 대한 몰이해, 명사의 오용과 남용, 명사에 대한 왜곡 해석에서 비롯된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한가지 예로 빨갱이란 단어만 놓고봐도 그러하다. 한가지 더 예를 들어보자. 자유 민주주의. 이거 어쩔 거냐, 이 말이다.

한국정당사를 뒤적이면 러시아 소설을 처음 접했을 때처럼 머리가 아파온다. 해방 직후부터 우후죽순, 오로지 1946년 발포된 미군정법령(美軍政法令) 제55호에 근거, 당원 수가 3명만 모이면 정당이 성립되던 시기에서 1948년 48개의 정당들이 참가한 제헌국회의원 선거까지…. 오, 이런 니콜라이 프세블로드비치 스타브로긴, 니콜라이 프세블로도브나 스타브로기나,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카라마조프…를 봤나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지금 내가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보수’와 ‘진보’가 대체 무엇이냐, 언제 어느 때부터 생긴 이름이냐 이를 논하고자 함이 아니다. 니콜라이 프세블로드비치 스타브로긴과 니콜라이 프세블로도브나 스타브로기나의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봐야 별 시덥잖은 인물일 게 뻔하고, 어쨌거나 한 50년 우리가 습관처럼 보수와 진보라는 명사를 써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여전히 보수와 진보라는 프레임에 갇혀 살아갈 게 뻔하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저 두 개의 명사는 살아있을 것이다. 36년 전통의 겐세이와 오뎅보다 더 오래, 우리 입에 착착 붙었기 때문이다.

내가 따지고자 하는 것은 이 중요한 두 개의 명사가 산이나 물같은 공적인 정의가 아니라 ‘자칭’이란 것이다. 그래서 네가 왜 보수며, 그래서 네가 왜 진보냐는 질문이다. 누가 너한테 보수란 이름을 허락했으며 누가 너에게 진보란 이름을 불러줬는지,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운동회의 청군과 백군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아아, 하물며 스스로 핀 꽃이었더냐? 국민이 너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막무가내로 다가와 50년 우겨서 핀 이런 꽃 같은 명사를 봤나…. 하지만 오늘도 내일도 당신은 보수요 진보요 설문조사를 받아야 하는, 참으로 지지 않는 ‘꽃 같은’ 명사이기 때문이다.

니콜라이 프세블로드비치 스타브로긴 같은 정치적 함의는 차치하고, 가장 쉽고 근원적인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자. 이른바 보수는 새로운 것을 적극 받아들이기보다는 재래의 풍습과 가치, 전통을 중히 여기어 유지하려는 뜻과 자세를 의미한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이제 우리에겐 지켜야 할 새로운 가치가 생겼다. 한반도 평화체제가 그것이다. 전환은 이미 시작되었고 이 새로운 역사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 되어 버렸다. 지난 세월 주적으로 대립해 온 분단체제가 그간 어쩔 수 없이 지켜야 할 우리의 가치였다면, 이제 그것은 빠르게 소멸해가는 과거의 가치이자 세계관이다. 다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나아가 새로운 가치를 획득하고 지킬 것인가, 그 기로에 모두가 서 있다. 다가올 6월13일 지방선거는 어쩌면 최초로, 국민이 그대들의 이름을 다가가 불러 주는 날이 될 것이다. 최초이자 마지막 기회인 이 새로운 가치를 ‘중히 여기어’ 유지하려는 국민들이… 지극히 보수적인 국민들이 진정으로 보수라는 이름을 선택하고 불러주는 날일 것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정신차려라 민주당. 이제 당신들이 보수다. 다가올 선거를 통해 우리 국민들이 실은 얼마나 보수적이고, 보수를 갈망해왔는지를 뼈저리게 느끼고 이제 스스로가 보수임을 선언하면 좋겠다. 그래야 혼란이 없다. 어느 날 자신의 이름을 개명한 캐시어스 클레이처럼, 새로운 가치를 중히 여기고 유지하고 지켜나가는 든든한 보수가 되어야 한다. 돌이켜보기 바란다. 언제 당신들이 리버럴했고 언제 당신들이 혁명적이었나를. 그러니 니콜라이 프세블로도브나 스타브로기나 같은 고민하지 말고 당당히 보수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를 나는 바란다. 무엇보다 아직도 진보라 여기며 스스로 퍼질러 앉은 그 널찍한 궁둥짝이 부담스럽다. 제발 자리 좀 옮겨주기 바란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데, 당신들 때문에 새 날개가 돋아날 자리가 없다 이 말이다. 그러니 정신차리고 제발 성큼, 견고한 보수로 자리 잡아라. 국민이 너의 이름을 불러줄 때 꽃보다 귀한 보수로 활짝 피어라. 정신차리고 당신들이 보수임을 자각하지 않으면 이 또한 영영 오기 힘든 마지막 기회일지 몰라 하는 얘기다. 지켜야 할 가치가 너무나 크고 중요하다. 새로운 보수의 시대를 열자. 꽃보다 보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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