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이해받고 싶다

2018.11.22 20:50 입력 2018.11.22 20:53 수정

영화 <툴리>의 한 장면.

영화 <툴리>의 한 장면.

“용서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해 하는 것이다.” 파티에 다녀온 남편이 어떤 아가씨를 데려다주는 길에 함께 자고 왔다고 말한다. 아내는 그런 남편을 용서해주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덧보탠다. 용서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해 하는 것이라고, 진짜 이해했다면 용서라는 말이 필요 없다고 말이다. 아이 넷을 키우고 있는 아내 수전은 가정을 유지하는 일이 ‘지성적’인 판단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남편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용서한다. 눈치챘다시피, 용서로 지탱이 되는 이 가정은 이미 균열되어 있다. 도리스 레싱의 소설 <19호실로 가다>의 가정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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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후반에 결혼한 수전은 꽤나 합리적인 판단으로 결혼을 하고, 전원주택으로 이사해 네 명의 아이를 낳았다. 모두 계획한 대로였다. 단조로운 생활을 하게 될 것도 알았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두렵거나 힘들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수전은 자신의 삶이 “자기 꼬리를 문 뱀과 같”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유지하는 게 원하던 일이었지만 그것을 유지하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막내가 제법 큰 이후엔 자기만의 방을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다. 집 안에 엄마의 방을 만들었지만, 수전은 그 방에서 하루 종일 아이들이 내일 입을 옷, 먹을거리, 일과를 설계하느라 생각이 쉴 틈이 없다. 혼자 있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다. 그래서 그녀는 호텔 19호실을 빌린다. 그리고 드디어 그곳에서 혼자가 된다. 누구의 어머니,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친구가 아닌 익명의 존재가 된 것이다.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고, 육아를 하다보면 나 자신을 잃고 산다고들 말한다. 영화 <툴리>에서 만나게 되는 여자 마를로(샤를리즈 테론)도 그런 인물 중 하나이다. 1남1녀의 어머니인 그녀는 현재 만삭이다. 지금은 막내이지만 곧 둘째가 되어야 할 아들은 좀 특별하다. 지나치게 예민한 아들은 일종의 정서적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와중에 셋째가 태어나고, 마를로는 말 그대로 독박육아에 시달린다. 시도 때도 없이 깨는 아이 때문에 정신이 반쯤 나가 있고, 그 와중에 두 아이의 식사와 등교, 준비물도 챙겨야 한다. 남편은 집에 돌아오면 이어폰을 낀 채 게임에 열중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나쁜 남편도 아니다. 아니, 그냥 평범한 남편의 모습이라는 게 문제다. 내가 젖이 나온다면 야간 수유라도 대신할 텐데라는 식의, 나름의 위로를 던지는 모습 말이다.

그때 밤에만 아이를 돌봐주는 도우미 툴리가 나타난다. 자신의 아이처럼 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툴리 덕분에 마를로는 정말이지 너무나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잔다. 쉬는 것처럼 쉬니 기운이 나서 아이들 간식도 챙겨주고, 주변 사람들에게 따뜻한 말을 건넬 여유도 생긴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챙기고 돌아보게 된다. 야간 보모 툴리는 마를로를 찾아 온 첫째 밤, 나는 아이가 아니라 바로 당신을 돌보기 위해서 왔어요, 라고 말한다. 그렇다. 보모는 사실 아이가 아닌 엄마에게 필요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엄마 마를로에게 아이들은 금세 크니 잠시만 견디세요,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도리스 레싱의 소설에 등장하는 수전을 보노라면, 그건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만은 아닌 듯싶다. 미친 듯 체력을 불태우며 수유기를 지나 학교에 갈 정도로 아이를 키우고 나면 과연 ‘나’가 돌아올까? 아이들로 북적이던 시간이 아이가 빠져나가면 고스란히 나의 것이 되어 줄까? 도리스 레싱이나 오정희의 소설을 읽다보면 그 대답은 아니라는 것처럼 다가온다.

오정희의 소설 <옛우물>에도 사는 집에서 좀 떨어진 방에서 자기만의 짬을 가지는 한 중년 여성이 등장한다. 45살 생일을 맞게 된 여성은 그 떨어진 예성 아파트에 가서 곧 허물어진 연당집을 내려다본다. 바보 아홉 명, 당상관 다섯 명이 태어났다는 연당집은 바로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는 여자의 내면, 젊음과 욕망의 결과물일 테다. 젊음과 욕망은 바보 같은 짓 아홉 개를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당상관처럼 자랑스러운 결과도 다섯쯤은 만들어 낸다. 그렇게 깊은 자기의 내면은 나만 혼자 있을 수 있는, 예성 아파트에 가서야 보인다. 19호실에 가서야 볼 수 있는 자기 자신이 있는 것이다.

영화 <툴리>의 결말에는 반전이 숨어 있다. 그 반전을 보고 있노라면, 결국 출산과 육아, 결혼과 가정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가장 상처 입는 것은 엄마, 아내가 아니라 그 무엇도 아닌 자기 자신임을 알 수 있다. 툴리는 힘들어하는 마를로에게 지금 당신의 모습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던 미래의 모습이 아니냐고 묻는다. 둔감하지만 착한 남편, 귀여운 세 남매. 브루클린의 옥탑방에 세들어 살 땐, 그토록 간절히 꿈꾸었던 미래의 모습이 바로 지금 아니냐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와 아내에게도 19호실과 예성 아파트는 필요하다. 그 무엇이라는 수식어를 다 뗀, 익명의 존재가 되어 나를 완전히 놓고 그래서 나만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간. 이 공간은 단순히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마트르슈카 인형처럼 나를 벗기고 벗겨 마침내 드러나는 작은 나, 50대에서 40대, 30대, 20대, 10대의 나. 마침내 아무것도 아닌 나와 만나는 과정. 마를로나 수전과 같은 여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침묵이나 무관심, 용서가 아니라 이해이다. 그녀에게는 다만 이해가 필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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