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마땅한 벌과 호모 나랜스

“악당이 성공할수록 작품도 성공한다.” 영화감독 앨프리드 히치콕은 1939년 컬럼비아대학교의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악은 입체적이다. 선한 사람들만 등장하는 이야기는 밋밋하다. 심지어 아동을 위한 이야기에도 악당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흥미를 느끼는 건 악 자체라기보다 처단이다. 악당이 응분의 처벌을 받을 때 분노와 몰입에 쓴 감정이 보상받는다. 미국의 작가 윌리엄 플레시는 이런 과정을 가리켜, 값비싼 신호(costly signaling)라고 부른다. 악당이 처벌받도록 이야기가 진화한 이유를 인류의 생존술로 본 것이다.

영어 표현 중에는 ‘마땅한 벌’을 의미하는 단어(comeuppance)가 있다. 우리는 언어가 사고방식을 반영한다는 것을 안다. 한국어에는 ‘마땅한 벌’ 같은 단어는 없다. 하지만 수없이 많은 단죄의 서사가 있다. 영화나 소설, 이야기를 통해 현실이 놓친 마땅한 벌을 집행하는 것이다. 한국의 대중 서사에 등장하는 악당은 대개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된다. 부패한 기득권, 오래 묵은 이데올로기가 악당을 양산하고 불합리를 방치한다. <더 글로리>의 연진 일당이 그랬고, 2023년 11월22일 개봉한 김성수 감독의 새 영화 <서울의 봄>(사진)에 등장하는 하나회 구성원들이 그렇다.

<서울의 봄>은 1979년 12월12일 군사 반란을 소재로 삼고 있다. 영화는 반란의 주체, 전두광과 군인 정신에 투철했던 이태신의 대결로 이야기를 꾸려 간다. 전두광은 군대 내 사조직 하나회를 자기 수족처럼 부린다. 법과 질서를 위반하면서 권력을 침탈하고 성공하면 혁명, 실패하면 쿠데타라며 소리 지른다. 결과가 의도를 결정한다는 도착적 사고를 가진 악당, 그가 바로 전두광이다.

문제는 12·12 군사반란이 실제 사건, 역사라는 것이다. 전두환은 반란을 일으켰지만 마땅한 벌을 받지 않았다. 반란 과정에서 처벌은 거꾸로 이뤄졌다. 이야기에서는 대개 악당이 벌을 받지만 현실에서 악당은 쿠데타에 성공을 해서 군부 독재의 암흑기를 연다. 악당이 승리하고, 오히려 원칙주의자가 패배하고 만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야기를 통해 보기 바랐던 순간은 아니다. 악당이 승리하는 불쾌한 결말을 관객이 원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감독은 역사와 다른 대안적 결말이나 허구적 징벌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그날 밤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인격화된 배우의 얼굴을 통해 생생히 전달한다. <서울의 봄>을 보면 독재 청산의 긴 이야기가 아직 제대로 된 적도 없음을 느끼게 된다. 이야기된 역사를 통해 관객들은 과연 누가 반역자이고, 악당인지 그리고 왜 죗값을 치르지 않았는지 절절히 깨닫게 된다.

이야기는 늦지만 세다. 영화 <서울의 봄>을 통해 역사적 사실로 침전되었던 분노의 감정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이야기를 통해 단죄되지 않은 악이 받았어야 할 마땅한 벌이 현재화된다. 무엇보다 그건 확고 불변한 역사적 평가의 정립이다. 뻔뻔한 기회주의자들은 반란이 혁명이라며 재활용하려 한다. 40여년의 세월과 망각을 빌미로 정치적 떡고물을 얻으려 하는 현실 정치의 망령이야말로 미완의 단죄가 가져온 부작용이다.

이야기하는 인간 호모 나랜스에게 이야기는 곧 생존이다. 이야기를 통해 인류는 주의해야 할 사람에 대한 경고 정보를 공유하고 상처받은 공동체 일원을 위로해왔다. 역사는 일회적 사건으로 끝나지만 이야기는 끊임없이 그 사건의 의미를 되짚는다. 이야기는 세상을 조금 더 나아지게 하기 위해 세상에 필요한 마땅한 결말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진정한 평가는 늘 사후에 타인들의 이야기 가운데서 결정된다. 매일 저녁 9시 뉴스에서 찬양되었던 전두환은 군인 정신을 배반한 범법자, 생명의 가치를 짓밟은 독재자에 불과하다. <서울의 봄> 속 전두광은 세상에 해약을 미치는 파렴치한 이기주의자에 불과하다. 살아생전 세속의 권력과 부를 누렸지만 이야기 속에서 전두환은, 마땅한 벌을 받을 때까지 거듭 소환될 것이다. 역사는 잊어도 이야기는 잊지 않을 테니 말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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