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신명 재판

2019.02.13 20:28 입력 2019.02.13 20:31 수정

최근 사법농단 혐의로 전 대법원장이 구속 수사를 받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검찰과 사법부에 대한 신뢰 역시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떨어진 것 같다. 가장 존중받아야 할 법원의 판결이 여론의 뭇매를 맞는 일도 흔해졌다. 음주운전, 아동학대, 성폭력, 여론조작, 권력남용 등 다양한 문제들에 관한 판결 결과가 그대로 언론에 노출되고, 여론은 이에 대해 좀처럼 수긍하지 못하는 것을 본다. 게다가 1심에서 무죄이다가 2심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다시 상고심에서 재판 결과가 번복되는 것을 보면, 시시비비를 가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정해진 법에 따라 죄의 유무를 판단하고 형량을 결정해야 한다는 원칙에는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방식이 정착되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과거 한때에는 옳고 그름의 잣대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역사와 현실]중세의 신명 재판

예를 들면 중세 유럽 사회에서는 특이한 방식의 심판 관행이 있었다. 1340년 프란체스코라 불리는 한 수도사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프랑스 왕위를 두고 선왕의 외조카인 영국 왕 에드워드 3세가 선왕의 6촌 남계형제인 필리프 드 발루아에게 전쟁 없이 왕위 계승 분쟁을 끝낼 수 있는 세 가지 방안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제안했다. 첫번째는 무기를 들고 결투를 하는 것이었다. 두번째 방안은 진정한 프랑스의 왕들이 관행적으로 해왔던 병자를 치료하는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세번째는 굶주린 사자 앞에 나서는 것이었다. 이 마지막 방안은 만약 필리프가 진정한 프랑스 왕이라면 사자도 그를 알아보고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한 것이었다.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면 두번째와 세번째 방안은 터무니없어 보인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세번째 제안은 중세 유럽에서 자주 활용되었던 일종의 신명재판이었다. 신명재판이란 불, 물, 독 등을 사용해 피고에게 육체적 고통이나 시련을 가하고 그 결과에 따라 죄의 유무를 판단하는 것이었다. 중세 유럽에서 마녀로 지목된 사람을 물에 집어넣어 가라앉으면 무죄, 떠오르면 유죄라고 판정한 것 또한 대표적인 신명재판이었다. 그러나 무죄면 물에 빠져 죽고 유죄면 다시 화형당했기 때문에 죽기는 매한가지였다.

15세기 말 이탈리아 피렌체에서도 불에 의한 신명재판이 벌어졌다. 이 재판의 주요 관련 당사자는 도미니쿠스 수도회 소속 수도사였던 사보나롤라였다. 때론 광적일 정도의 열렬한 설교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는 1494년 이후 4년간 피렌체 정치를 사실상 주도했다. 그사이에 교황 알렉산드르 6세를 신랄하게 비판했고, 1497년에는 피렌체 시청 광장에 가발, 거울, 도박 카드, 악기, 책, 그림, 조각 등을 쌓아놓고 허영의 화형식을 거행했다.

이 화형식에 감동의 눈물을 흘렸던 피렌체 시민들도 있었지만 반대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가장 강력한 반격은 프란체스코 수도회로부터 나왔다. 당시 두 수도회는 사사건건 부딪치는 영원한 앙숙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피렌체 산타 크로체 성당에서 설교를 하던 한 프란체스코 수도사 프란체스코 다 풀리아가 교황에 대한 사보나롤라의 불복종이 정당한지, 사보나롤라가 진정 하느님의 예언자인지를 가리기 위해 불의 심판을 받자고 제안했다. 물론 자신도 불 속을 직접 통과하겠다고 약속했다. 사보나롤라의 제자였던 도메니코 부온비치니는 프란체스코의 도발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문제는 양 교단에서 누가 이 위험천만한 불의 심판을 감수하느냐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보나롤라는 자신이 직접 불 심판을 받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 이 불의 재판을 제안했던 프란체스코도 자신보다 낮은 지위의 도메니코를 상대하지 않겠다고 발을 뺐다. 결국 핵심 당사자였던 프란체스코와 사보나롤라는 모두 빠지고 그들보다 낮은 지위의 도메니코와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 수도사 줄리아노 론디넬리가 불의 심판을 받기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1498년 4월7일 마침내 시청 광장에 장작더미로 만든 불의 길이 설치되었다.

이 불의 심판은 세부적인 재판절차에 관해 계속 논란이 이어지고, 급기야는 비까지 내리면서 사실상 무산되었다. “신께서는 불의 심판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불의 심판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실망과 분노를 사보나롤라에게 돌렸다. 분노한 군중을 피해 도망갔던 사보나롤라는 결국 체포되어 감금되었고, 스트라파도(strappado: 손을 뒤로 해서 가죽으로 묶은 다음 공중으로 들어 올려 떨어뜨리는 도구)라 불리는 끔찍한 고문을 당하자 자신의 말이 다 거짓말이라고 진술해야 했다. 그는 1498년 5월23일 시청 광장에서 화형당했다.

위의 사례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중세 유럽 사회에서 죄의 유무를 가리고 정의를 실현하는 한 방편이었던 신명재판은 현재의 우리에게는 너무나 낯설고 비합리적이다. 그런 점에서 중세 유럽인들이 우리와는 다른 이상한 세계에 사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하지만 역사의 시간을 미래로 확대해보면 우리가 사는 현재의 세계 또한 수세기 후의 후손들에게는 낯설고, 죄의 판단에서 정의롭지 못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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