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그리고 법치

2019.08.06 20:57 입력 2019.08.26 11:23 수정
이범준 사법전문기자

한국과 일본이 통과하고 있는 지금 이 갈등을 두고 법원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이제 와서 대법원의 강제동원 피해자 손해배상 청구소송 판결의 당부를 사회가 논쟁할 이유도 없다. 강제동원 판결은 한·일 양국의 정치와 외교를 폭발시키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며칠 전 어느 판사가 대법원 판결의 문제점을 적어 돌렸다는데, 이 세상은 20대의 좋은 머리로 정답을 적어내던 사법시험장이 아니다.

[이범준의 저스티스]정치 그리고 법치

시민들은 분노와 불안이 뒤섞인 눈으로 공동체의 운명을 근심하고 있다. 일본은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소문, 하루 이틀 불매운동으로는 상황을 바꾸기 어렵다는 얘기, 중국과 러시아가 서성이고 환율이 들썩거리는 상황에 기시감마저 느낀다. 이런 시국에 세금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 뒤늦게 판결의 논리전개나 시비하고 있으니, 물정 모른다는 얘기를 듣는 것이다. 그나마 그 내용도 알 만한 사람은 아는 것이다. 눈에 띄는 새로운 이론은 없다. 지금 이 위기는 대법원 판결에 이론적 정합성이 부족해 생긴 게 아니다. 강제동원은 역사 문제이자 정치 문제이고 외교 문제인데, 그걸 풀지 못해 이러고 있는 것이다.

민주적 정당성이 없는 사법부는 사회갈등 앞에서 무력하다. 가령 패전국 일본은 1947년 일본에 거주하던 조선인의 일본 국적을 박탈했다. 대한민국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없던 때다. 그래서 조선반도 출신이란 의미로 조선적(朝鮮籍)이라고 외국인등록부에 적혔다. 이 조선적을 유지해온 사람과 후손이 조선적이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2008년부터 한국 정부는 조선적의 입국을 막았다. 이에 조선적 역사학자 정영환이 소송을 냈다. 박유하 교수의 위안부 관련 주장을 강하게 비판하는 그 학자다.

정영환은 “나는 법률상 한국인이다. 국가가 국민의 입국을 어떤 근거로 막느냐”고 했다. 실제로 1996년 대법원은 “조선인을 부친으로 하여 출생한 자가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했다. 조선왕조의 백성과 후손은 한국 국적이란 얘기다. 2013년 대법원은 정영환의 패소를 확정했고,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다 2017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 조선적을 모두 입국시켰다. 보수야당도 별달리 반대하지 않았다. 정영환은 이듬해 입국해 서울대에서 조선적에 대해 강연했다. 정치적으로는 손쉽게 해결될 사건이었지만 사법부는 감당하지 못하고 주저앉은 것이다.

지금 생생하게 보고 있듯이, 사법판단이 모든 분쟁을 종결시키지 못한다. 저작권법 전문가인 남형두 연세대 교수는 예술에 법이 개입하는 일에 부정적이다. 조영남 위작 사건이 수사와 재판으로 이어진 일을 대표적인 사례로 든다. 사법적 해결에 적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 법원의 결론이 종국적 해법이 되지도 않는다고 했다. 자치에 맡겨두었다면 풍부한 예술 논쟁을 통해 예술 발전에 기여했을 일이 법의 성급한 개입으로 예술의 자유와 발전을 저해했다고 본다.

환경 논쟁을 사법으로 결론 낸 새만금 판결에 대해 환경법 전문가인 조홍식 서울대 교수도 비판한다. 판사 출신인 그는 정치를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있다고 했다. “정치과정이 실패할 때도 물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법원이 그 실패를 적시에 인식할 수 있는 능력과 자원을 갖추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또한 법원이 개입한다 해서 더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새만금 1심 판결 직후 언론에 기고한 글이다. 두 사람 모두 법조인 출신 법학자이다. 이들은 논쟁과 토론, 타협과 협상, 다시 말해 정치행위가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정치과정을 사법판단이 대체하는 단계를 뛰어넘어, 사법판단이 정치과정을 살해한 사건이 2014년 통합진보당 해산이다. 헌법연구관 출신 전종익 서울대 교수는 “핵심적인 인물들에 대한 형사재판이 곧 예정되어 있고 국회의원 총선거가 2016년 봄에 있을 예정이었던 상황에서 사법적인 판단보다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정치과정에서 해결하도록 하는 것이 정치과정 이론에서 보면 더욱 바람직한 것으로 평가된다”고 이듬해 논문에서 밝혔다. 사법심사를 자제하고 정치과정을 기다렸어야 한다는 얘기다. 당시 유일하게 반대의견이던 김이수 헌법재판관은 법치주의 못지않게 민주주의가 소중하다는 소수의견을 남겼다.

“헌법이라는 탐조등(探照燈)으로 우리 사회의 갈 길을 찾아 나설 때, 우리는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두 축으로 하는 민주적 기본질서의 바탕이자 토대가 되는 ‘자율과 조화’의 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헌법 전문의 근본정신이다. ‘합리적 보수’와 ‘합리적 진보’를 찾기 어렵고 서로를 겨누는 거친 언사들이 난무하는 우리의 삭막한 현실에서, 진정한 의미의 ‘사회의 통합’과 ‘화해’를 갈구하는 이들에게 주는 우리 헌법의 가르침도 바로 이것이다.”

숙적(宿敵) 일본을 상대로도 대한민국 헌법이 똑같이 작동한다는 것이 대법원 강제동원 판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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