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소서 관리 총력전에 희미해진 배움의 이유

2019.09.04 20:32 입력 2019.09.04 20:38 수정

얼마 전 나의 강연을 들었다고 하는 분께 전화를 받았다. 그는 나에게 자녀의 대입 자기소개서를 첨삭해 줄 수 있을지를 물었다. 사실 이러한 요청은 이전에도 한 번 받았고 가끔은 이보다 더욱 특별한 일도 일어난다.

[직설]자소서 관리 총력전에 희미해진 배움의 이유

나는 그에게 “죄송하지만 제가 요즘 글을 쓸 시간도 부족해서요, 그리고 제가 중등교육의 전문가도 아니니 그런 일을 잘하는 분들을 찾아보시면 어떨까요?” 하고 물었다. 그러나 그는 대치동이라든가 하는 데서 이미 정보를 많이 얻었고 첨삭도 받았지만, 그러면 너무 ‘관리’를 받은 티가 나니까 나에게 한 번 더 관리를 받고 싶었던 것이라고 했다. 내가 다시 한번 어렵겠다고 하자 그는 대한민국의 엄마로서 살아가는 것이 참 어렵다면서 작가님도 아이가 크면 느끼게 될 것이라고 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아이를 대학에 보낼 생각이 별로 없다고, 답하고 말았다. 이것은 진심이었다.

사실 정말로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왜 아이의 자기소개서에, 그의 인생에 관리가 필요한지. 많은 이들이 어떻게든 아이를 명문대에 보내고 싶어 한다. 위법과 편법의 범위를 넘나들면서 법이 허락하는 그 테두리 안에서 모든 것을 한다. 특히 당사자가 아닌 그 부모들이, 혹은 한 가문이 총력전을 기울여서 한 개인을 ‘관리’한다. 그러나 나는 아이가 입시를 치를 나이가 된다고 해도 굳이 그러한 세계에 아이와 함께 들어가고 싶지 않다. 아이도, 나도 행복하지 않을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아이가 조금 더 좋은 대학에 가게 된다고 해도 나는 아이의 발을 잡고 말리고 싶다. OO아, 지금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아, 하고. 그가 공부하며 행복하다면 물론 공부를 선택하기를 바란다. 본인의 삶을 책임지겠다는 확신이 있다면 아무래도 괜찮다. 그 무엇이든 결국 온전히 그에게 달린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과연 무엇을 선택한다고 해도 개인이 행복할 수 있는 곳인가는 잘 모르겠다. 유치원생인 나의 아이는 일주일에 한 번 수영학원을 다니고 있는데 거기에서도 모든 아이들의 수영모 색깔이 다르다. 태권도복의 띠가 흰색부터 검은색까지 다양한 것처럼 그들의 레벨에 따라 그 색을 다르게 해 둔 것이다. 부모들이 수영장 카페테리아에 앉아 통유리 너머로 지켜보는 가운데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수영모를 쓰고 강습을 받는다. 어쩌면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보내는 모든 공간에 저마다의 색과 숫자가 있고, 그 구조 안에서 자연스럽게 부모와 아이가 함께 타인과 경쟁하고 있을 것이다.

학부모와 교사, 특히 자신을 닮은 학생들에게 보내는 자신의 교육론을 쓴 고등학생, <삼파장 형광등 아래서>의 노정석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우리의 인생에서 어떤 숫자가 우리의 행복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다면, 그것은 어젯밤 전투에서 죽은 전사자의 수, 오늘 일어난 자동차 추돌사고의 사망자, 테러 희생자 같은 것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에 따르면 숫자는 입시제도가 만들어 낸 허영이고 가짜행복일 뿐이다. 공부라는 것은 더 배우고자 하는 개인의 욕구에서 나온다. 부모도, 학교도, 사회도, 자녀와 학생 그리고 젊은 세대들이 배움에 대한 욕구를 스스로 가질 수 있게 그 기반을 조성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처럼 그들을 경쟁과 관리에 매몰시키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나에게 전화한 학부모에게 나는 “교수도 대학에서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이 가장 기뻐하는 일은 누군가가 자신의 논문을 읽어주는 일입니다. 자녀분께서 면접을 볼 때 그들의 최근 논문의 제목과 초록만 읽고 들어가도, 가장 인상적인 학생으로 남을 것입니다”라고 말해 주었다. 이 역시 대치동 전문가들이 하는 관리의 영역인지, 아니면 대학에서 오래 공부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환상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의 아이가 자신의 삶을 자신이 선택하며 살아갈 수 있으면 한다. 경쟁과 관리라는 단어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면 성공하든 실패하든 자신이 누구인지 더욱 명확히 알게 되고 그로 인해 행복해질 것이다.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것만큼 큰 행복은 없다.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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