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바인

2019.10.20 21:00 입력 2019.10.20 22:41 수정

‘비극에 대한 가장 완벽한 보고서’라는 부제가 붙은 책 <콜럼바인>을 며칠에 걸쳐 무서운 마음으로 읽었다. 무섭다고 말하는 것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김인숙의 조용한 이야기]콜럼바인

1999년 미국 컬럼비아주의 고등학교 콜럼바인에서 벌어진 총기난사 사건에 관한 책이다. 700쪽에 가까운 두꺼운 책인데, 단순히 사건에 대한 취재와 분석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부제로 붙은 말마따나 그 비극에 대한 총체적인 보고서이다. 도대체 그런 일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그리고 도대체 그런 일은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 것일까.

1999년 4월20일. 두 명의 소년이 폭탄과 산탄총으로 무장을 하고 자기가 다니던 학교로 태연히 걸어들어가 학생 12명과 한 명의 교사를 죽였다. 그들의 계획대로였다면 훨씬 더 많은 희생자가 나왔을 것이다. 책은 그들이 범행을 계획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매우 세밀하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건 아니다. 아마도 사이코패스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총격자와 그의 공범이 범행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끔찍한 정신세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너무나 정상적이지가 않아서 오히려 안심하는 마음을 갖게 할 정도다.

언제나 더 무서운 것은 극히 정상적으로 판단되는 사람들이 극히 정상적이라고 믿으면서 저지르는 일들이다. 그래서 이 총격범들에 대한 이야기가 무서워지는 건 오히려 그들이 평범한 가정에서 보통의 소년들로 자라났다는 지점이다. 두 소년 중 한 소년의 어머니는 그 후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라는 책을 썼다. 강연도 했다. 그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 아들이 겪는 정신적 문제에 대해 몰랐다고 말을 한다. 변명을 하는 건 아니다. 알 수 없었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렇더라도 ‘왜’라는 질문은 남는다. 아니 그래서 더 남을 것이다.

책은 또 희생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그들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뿐만 아니다. 사건 처리 과정의 실수를 은폐하려는 공권력의 시도, 사건을 자극적으로 다루려는 언론의 행태, 심지어 희생자를 종교적으로 추앙하는 종교단체의 이야기도 나온다. 사건은 어떻게든 이미 벌어졌지만, 그것을 처리하고 극복하는 과정이 복마전으로 치달으면서 사건은 비극이 된다. 책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사건의 실체를 낱낱이 파헤치려고 노력했던 한 희생자의 부모가 좌절을 겪은 끝에 하는 말이다. “‘나’는 정의를 단념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고 아무것도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미국에서 벌어진 일이다. 게다가 총기난사 사건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적어도 총기와 관련된 사건은 이런 식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다행인가? 책을 읽는 내내 ‘그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없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사이코패스든 무엇이든, 총기 구입이 그토록 수월하지 않았다면, 마치 편의점에 가서 술 몇 병 사듯이 그렇게 쉽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이런 일이 이렇게 쉽게 벌어지지는 않을 텐데 하는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들었다. 미국에 살고 있었다면 당장 총기규제에 찬동하는 서명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래서 다행’인 이 나라에서도 사람은 죽는다. 총에 맞아 죽듯이 댓글에 맞아 죽는다. 댓글을 쓰기 위해 클릭을 하는 건 총을 사고 탄환을 장전하고 방아쇠를 당기는 것보다도 더 간단한 일일 것이다. 너무 간단한 나머지 누가 죽을 줄은 몰랐다고 말하는 변명도 가능할 터이다. 그러나, 비겁하다. 용서가 안되는 변명일 것이다.

또 한 사람의 비극적인 소식 때문에 지난주 내내 마음이 아팠다. 이렇게 되기 전에 한마디쯤은 해줘도 좋았을 텐데. 닿지 않더라도, 할 수는 있었을 텐데. 그녀의 나이 때부터 시작해서 이 나이 될 때까지 브래지어라고 하면 그야말로 진절머리를 내는 나로서는 그녀에 관한 기사가 나올 때마다 눈이 갔다.

당당해서 참 보기 좋았다. 그 친구가 투사가 아니고 여권운동가도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이겼으면 했다. 그것이 단순히 옷차림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여성에 관한 인식의 문제이며, 여성이 스스로 취해야 할 권리와 태도에 관한 문제라는 걸 알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자꾸 미안해진다. 그 친구의 참담한 결정이 단지 그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을 거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한 가지 원인이 어디 있겠나. 모든 원인은 서로 얽혀 있고 어떤 원인이 또 다른 원인을 촉발한다.

책 <콜럼바인>에서는 그날 총격으로 인해 심각한 부상을 당한 한 소년의 이야기가 나온다. 누가 너에게 이런 짓을 한 줄 아느냐는 부모의 질문에 소년의 대답이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냥 용서해줘요, 제발요.”

용서는 당한 사람이 하는 것이지 당하게 한 사람이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어느 글에다 쓴 적이 있다. 가해자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다. 피해자가 세상을 떴으니 그 뒤에 남은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용서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노력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미안하다는 말은 부족하기 짝이 없다. 안다. 최진리법을 입안하자는 청원에 눈이 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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