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아닌 고3

2019.11.22 21:10 입력 2019.11.22 21:12 수정

202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났다. 11월 들어서도 가을볕이 내내 온화하더니 수능시험이 있던 14일에는 전날에 비해 최저기온이 6도가량 떨어져 영하권에 머물렀다. 하지만 수능 한파는 낭설이다. 1993년부터 올해까지 스물여섯 번 수능시험이 치러지는 동안 기온이 영하권으로 떨어진 날은 일곱 번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날씨보다는 마음의 온도가 더 차가웠던 것이다.

[시선]고3 아닌 고3

이번엔 춥긴 했다. 하루 종일 온 나라가 긴장 상태였다. 지각 수험생을 태운 경찰차를 위해 운전자들이 꽉 막힌 도로를 터줬다는 미담이 올해도 들려왔다. 인천 상공에서는 항공기들이 듣기평가가 끝날 때까지 착륙을 하지 못한 채 빙빙 돌았고, 학부모들은 교회와 성당, 사찰에서 애타게 기도했다. 포털 사이트에는 과목별 난이도, 정답, 등급컷 등이 실시간 검색순위에 올랐다.

수능은 단순한 입시고사가 아니라 인생의 큰 시험이다. 수험생들이 겪는 고통과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잘될 거야” “못 봐도 괜찮아”와 같은 격려는 너무 쉬운 말일까 봐 꺼내기 조심스럽다. 다만 이제 자유를 만끽하라고, 그동안 참았던 것들 다 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물론 수험생들은 이미 ‘마친 자의 여유’를 한껏 누리면서 신나게 노는 중이다. 놀이공원, 영화관, 레스토랑, 공연장, 의류매장, 카페, 헬스클럽 등 세상의 온갖 즐거운 곳들이 수험생들을 두 팔 벌려 맞아주는 중이다. 수험표를 제시하면 여러 가지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이 국가적 이슈에서 완전히 소외된 학생들이 있다. 입시 대신 취업을 택한 특성화(실업계) 고교생들이다. 수능 전에는 어떤 응원도 못 받고, 수능 후에는 축제에 아예 초대되지 않았다. ‘고3’인데 아무도 고3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고3은 오직 인문계 학생들에게만 허락되는 호칭이다. 수능날 저녁, 지하철에 탄 수험생들을 다독여준 기관사의 방송이 화제가 됐다. 승객들도 “고생했어요” 따뜻한 위로를 건넸다. 그 열차 안에는 공장에 현장실습을 나가 종일 기계를 만지고, 기름때 묻은 손을 점퍼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집으로 돌아가는 특성화고 3학년들도 있었을 것이다. 열차를 메운 말의 온기가 그들에게는 전해지지 않았다. 수능 한파는 수능을 보지 않은 학생들에게 더욱 매서웠던 것이다.

사회에서는 그들을 ‘학생’도 아니고 ‘사회인’도 아니라고 한다. 공부 못해서 공고 다니고, ‘질’이 나빠서 상고 다닌다는 낡은 편견을 아직도 버리지 못했다. 우리나라 대학 진학률은 69%다. 나머지 31%의 학생들은 대학에 가지 않는다. 또래들이 꿈꾸는 캠퍼스의 낭만, 해외 어학연수, 동아리 활동을 일찌감치 포기한 채 기술 인력이 되어 빨리 사회에 진출하기를 택했을 뿐이다. 응원의 박수를 보내줘야 한다. 물론 그들 스스로 선택한 길이라지만, 너무 외롭다. 온 세상이 수험생들의 수고에만 주목하는 동안 특성화 고교생들과 학교 밖으로 나온 청소년들이 발 딛고 선 음지의 소외는 더 크게 자라난다.

이 무관심은 결국 비극을 낳게 된다. 2015년 구의역 스크린도어 수리 중 숨진 김모군은 현장실습을 나온 ‘실업계 고3’이었다. 2017년 제주 구좌리의 음료제조공장에서 사고로 숨진 이민호군 역시 마찬가지다. 수능을 치르지 않는 학생들이 어디서 무얼 하는지,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우리는 알아야 한다. 경향신문은 지난 21일자 1면을 산업재해로 사망한 노동자 1200명의 이름으로 채웠다. 제목은 ‘오늘도 3명이 퇴근하지 못했다’였다. 안전의 사각지대도 무섭지만, 무관심과 소외라는 그늘은 더 어둡다. 입시 대신 취업을 택한 고3들이 곧 산업 현장에 진출한다. 그들이 안전하게 퇴근할 수 있는 세상은 차별 없는 관심에서부터 만들어진다. 레스토랑과 놀이공원에 수험표 대신 납땜 인두기와 기술자격증을 제시해도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수능날을 기다려본다. 더는 17년 전과 똑같아선 안된다. 내가 겪어서 안다. 나도 실업계 고3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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