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나를 가장 기쁘게 한 일

2019.12.20 20:58 입력 2019.12.20 21:02 수정

매년 이맘때가 되면 한 해 동안 잘한 일과 잘못한 일들을 헤아려보곤 한다. 잘못한 일들을 꼽아보다 열 손가락으로는 부족해서, 더 속상해지기 전에 그만뒀다. 그러고는 잘한 일들을 생각했다.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건강하게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데, 선물 같은 순간까지 여럿 있었다. 꽤 살 만했던 한 해였다. 제대로 따지고 보면 뭐 하나 나아진 것 없지만, 그럼에도 대책 없이 삶을 낙관하고 있다니! 내 존재를 뒤흔드는 고난은 아직 오지 않은 게 분명하다.

[시선]2019년 나를 가장 기쁘게 한 일

개인적인 성취들을 잠깐 자랑해본다. 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실업계 고등학교 지하 납땜 실습장에서 박사학위 수여식까지 17년 걸렸다. 나름 한길로 잘 걸어왔다고 생각하니 스스로가 대견해 뭉클했다. 산문집과 문학비평집 등 두 권의 책을 더 냈고, 한 매체에 반년 동안 매주 동해안 기행문을 연재했다. 박사 후 국내연수과정 연구원이 됐고, 강사로 임용돼 대학에서 강의도 하게 됐다. 글쓰기보다 더 맹렬히 몰두하는 취미활동인 낚시에서도 큰 성과가 있었다. 지난 6월 러시아 아무르강에 가서 ‘지구상 모든 연어의 아버지’라는 신령한 물고기 ‘타이멘’을 낚아낸 것이다. 1m가 훌쩍 넘는 대물이었다.

그런데 나를 더 기쁘게 한 일들은 따로 있다. 그것들은 너무나도 사소하고 내밀해서 차마 밝히기 민망하다. 그래도 고백해보자면, 얼마 전에 굴밥을 지어 먹었다. 불린 쌀과 무채와 도라지와 대추와 밤과 표고버섯과 마늘과 싱싱한 생굴을 넣고 뚝배기밥을 지었는데 몹시 잘됐다. 양념간장에 비벼 먹으니 꿀맛이었다. 함께 시를 ‘앓던’ 스무 살, 나만큼 궁핍했던 선배가 사준 굴밥의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몇 년 동안 생각만 했던 일, 뭐가 어렵다고 그동안 안 했을까? 잘 지어진 밥에서 모락모락 오르는 김에 얼굴을 묻은 채 촉촉하고 뜨거운 ‘추억의 미스트’에 젖는 순간 나는 참 행복했다. 지난 1월에는 엄마를 유럽에 보내드렸다. 엄마의 생애 첫 해외여행이었다. 홈쇼핑 초특가 패키지 관광 상품이었지만, 다녀오기 전에도 또 다녀온 후에도 “실감이 안 난다”며 기뻐하는 엄마를 보며 미안했다. 자식들을 좋은 세상에 살게 하려 평생 희생만 했는데, 엄마에게도 좋은 세상을 보여드려야겠다는 생각을 왜 못했을까? 생각이야 늘 했지만 실천에 옮기는 게 어려웠다.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새해에는 더 사소하고 더 아무것도 아니고 더 개인적이고 더 작고 더 구체적인 것들을 많이 이루고자 한다. 술을 줄일 것이다. 내가 내 괴로움을 잊고자 술을 마시면 나를 사랑하는 이들이 괴로워진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4년째 요양병원에 누워 계신 할머니께 더 자주 찾아가 가까이 안고 어루만져드릴 것이다. 신경이 손상되어 입을 내내 벌리고 계시는 탓에 불쾌한 냄새가 나는데, 할머니를 사랑하지만 할머니에게서 나는 악취는 싫어하는 이중성에 스스로 괴로웠다.

그런데 며칠 전, 할머니 뺨에 얼굴을 대고 보청기에다 ‘도라지타령’을 틀어드렸더니 웅얼웅얼 따라 부르셨다. 냄새가 참을 만하게 느껴졌다. 병원을 나서면서 내가 나에게 “잘했다”고, “대견하다”고 칭찬했다. 새해엔 내가 나의 관객이고, 내가 나의 심사위원이고, 내가 나의 시상자인 레드카펫이 일상의 더 많은 곳에 펼쳐지길 기대해본다.

내가 출강하고 있는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학생들이 최근 여성과 소수와 약자의 목소리를 담은 문예지 ‘NOIZY’를 기획해 크라우드펀딩에 성공했다. 목표액을 200% 초과 달성했다며 웃음과 울음이 뒤섞인 환희의 표정들을 지었다. 독립출판물은 주목보다는 소외, 빛보다는 그늘의 운명을 감내해야 함을 학생들도 알 것이다. 그럼에도 작은 성과에 웃고 큰 성과에 울면서 묵묵히 나아가는 그 걸음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들리라는 사실을 나는 믿는다. 새해엔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알기에 소중한 기쁨들이 가득했으면 좋겠다. 나에게도, 여러분들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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