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자유를 위한 투표

2020.04.12 20:42 입력 2020.04.12 20:53 수정

“언젠가 내게 말했지. 진실한 사랑은 정해진 룰에서 벗어나지 않는 거라고. 그럴 수도 있겠지 (…) 들어봐, 나의 사랑은 함께 숨 쉬는 자유. 애써 지켜야 하는 거라면, 그건 이미 사랑이 아니지.”

21대 국회의원 선거 사전투표를 위해 길고도 긴 줄에 서서 윤상의 ‘사랑이란’을 흥얼거렸다. 예전에 즐겨 듣던 곡인데, 특히 ‘룰’과 ‘자유’의 대비를 좋아했다.

[지금, 여기]사랑과 자유를 위한 투표

사랑에서 룰이라고 하는 건 사회적으로 합의된 정상성의 규범들을 의미할 터다. 예컨대, “사랑의 완성은 결혼”이라는 말처럼. 반면에 자유는 우리를 옥죄는 고정관념을 깼을 때 만나게 되는 새로운 세계를 그려보게 한다. 규범에 저항하고 나답게 사랑함으로써 오롯이 존엄할 수 있는 상태. 문득, 제대로 사랑하기 위해 가족들과의 갈등을 기꺼이 감수했던 배윤민정 작가의 ‘가족 호칭 개선 투쟁기’ <나는 당신들의 아랫사람이 아닙니다>가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사랑과 자유의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근대의 시작과 함께 신민(subject)에서 주체(subject)로 거듭난 개인은 신분적 운명을 비롯해 신앙과 전통 등 확실성의 토대를 잃었다. 그리고 이제는 모든 게 자유로운 개인의 선택과 노력에 달렸다는 신화가 근대인의 삶을 지배한다. 이런 믿음은 무한한 가능성과 함께 불안정 시대를 열어젖혔다.

그렇게 불안한 그의 앞에 ‘본능’이자 ‘가장 위대한 정신작용’으로서 ‘낭만적 사랑’이 새로운 운명으로 등장한다. 더불어 운명적 사랑으로 빚어낸 핵가족이야말로 나의 정체성과 지위를 보장해 줄 마지막 보루가 된다. 울리히 벡과 엘리자베트 벡-게른샤임은 <사랑은 지독한 혼란>에서 사랑이야말로 “세속적인 신흥종교”이자 “현대의 근본주의”라고 말한다. 문제는 근대적 핵가족이란 가정의 주인인 남성과 그에 종속된 여성(과 아이들)이라는 ‘성별지위’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이다.

에바 일루즈에 따르면 19세기까지는 이런 사랑이 구애와 청혼, 결혼식이라는 공공의 의례와 여전히 견고했던 가족 공동체의 승인을 통해 보증되었다. 하지만 20세기는 변혁운동의 시대였고, 낡은 사랑의 룰은 끊임없이 도전을 받았다. 여성운동은 성별지위를 뒤집어엎었고, 퀴어운동은 이성애 규범을 해부했다. 사랑은 이제 공동체로부터 분리돼 온전히 개인적인 것이 되었다. 사랑을 보증해주는 건 오직 파트너의 진정성뿐이지만, 이보다 더 불확실한 것이 어디에 있는가. 대중문화가 그토록 사랑타령에 목을 매는 건 이 때문이다. 사랑의 진정성을 셀링포인트로 삼아 대중을 위로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선 그 불안을 아예 냉소해버린다. 사랑과 결혼을 그저 완수해야 할 프로젝트로 전락시키는 결혼 시장이 그렇다. 여기서 사랑은 결혼 중매 사이트의 ‘회원 정보’처럼 데이터화되어 버린다. 그래서 일루즈는 말한다. 사랑의 고통은 개인의 심리 탓이 아니라 사회 구조의 문제라고.

생각 없이 흥얼거리던 노래 탓에 기분이 착잡해지자, 이번에는 생활동반자법이 기억났다. 생활동반자법은 “혈연이나 혼인으로 이뤄진 민법상의 가족이 아닌 두 성인이 합의하에 함께 살며 서로 돌보자고 약속했을 때, 필요한 사회복지 혜택과 제도적 권리를 보장하고, 동거 생활을 시작하고 해소할 때 필요한 공정한 절차를 규정하는 법”(황두영, <외롭지 않을 권리>)이다.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고 성별위계를 지속시키며 관계를 제약하는 룰을 깨고 나가되, 홀로 자유로울 수 있다는 환상이 만들어내는 불안을 위로하고, “함께 숨 쉬는 자유”를 준비하기 위한 대안. 그건 어쩌면 ‘동반자’에 대한 생각의 전환으로부터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삶의 지향을 공유하고, 사소한 생활 습관을 이해하며, 서로를 어여삐 여기는 비빌 언덕으로서의 동반자. 꼭 성애적 관계가 아니라도 말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쳤을 때, 손에는 두 장의 투표용지가 들려 있었다. 나는 사랑과 자유를 위해 투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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