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대 국회는 ‘식물’처럼만이라도

2020.04.19 21:01 입력 2020.04.19 21:05 수정

4년에 한 번, 습관처럼 공보 몇 줄 읽고 신분증 들고 도장 찍는 선거권에 큰 의미를 두진 않았다. 그래도 이번 선거는 한국만 치러내는 ‘세계적인 행사’여서 참여의 기쁨이 남달랐다. ‘88올림픽’ 이후 애국심은 남아있지 않다 여겼고, 일도 안 하고 만날 쌈박질만 한다며 욕만 해대던 국회의원 선거를 하다 애국심이 샘솟을지 미처 몰랐다. 게다가 김치 버무릴 때나 쓰던 비닐장갑을 끼고 투표를 하는 것도 신기하여 일찌감치 사전투표를 마쳤다.

[지금, 여기]21대 국회는 ‘식물’처럼만이라도

국가대표 축구경기 때처럼 개표방송 시간에 맞춰 치킨을 사다 놓고 텔레비전 앞에 앉아 식구들 모두 자리를 잡았다. 지난번 지방선거 때 치킨을 주문하니 2시간은 기다려야 한다 해서 결국 치킨은 포기했던 적이 있어서 이번에는 예약 주문으로 시간도 딱 맞췄다. 왜 선거를 민주주의의 축제라고 이야기하는지 알 것도 같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선거일을 휴일로 보장받지 못하지만 또 많은 이들은 주중에 하루 쉴 수도 있고, 개표방송 보면서 먹고 즐길 수도 있는 날이니 축제라면 축제다. 게다가 외식 자영업에 대목이 하루라도 더 생기면 좋은 일 아닌가.

업무 차원에서 이번 총선에 출마한 후보들의 정보와 공약을 깊게는 아니어도 넓게나마 살펴보았다. 현역 의원들의 경우 정보에 접근하기 더 쉽다. 입법활동에 대한 정보가 국회의안정보시스템과 참여연대에서 운영하는 ‘열려라국회’ 사이트에 고스란히 공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임위와 본회의 출석률, 대표 발의한 법안이 몇 개인지, 법안 내용이 무엇인지, 그리고 통과가 되었는지 조목조목 나와 있다. 관심 분야인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소속 국회의원들의 발의 법안을 좀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실망도 했다. 여기에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유명한 ‘전국구 스타’들의 입법활동 성적표를 훔쳐보는 재미도 컸다. 유독 스타 국회의원들은 발의한 법안도 적고 가결된 법안은 더 적다. 상임위부터 본회의 출석률도 반 평균 깎아 먹는 수준. 하긴 자신들의 이름을 드러내는 일이라면 입법활동이 아니라 언론에 얼굴을 들이미는 것이 낫다고 보았으려나.

나는 피선거권자이기도 하지만 선거권만 행사하는 유권자로만 살아왔으니 국회의원이 뭘 하는 사람인지 잘 모른다. 금배지를 달고 거들먹거리는 자들, 조폭 수준의 난투극을 벌이는 집단이기도 하지만 이들은 ‘법을 만드는 자들’이다. 유독 판사, 검사, 변호사 출신들이 많은데도 발의 법안을 보면 수준 이하인 경우가 많다. 교묘하게 자신의 지역구 사업을 법의 이름으로 버무리거나 자신의 이해관계에 얽혀 있는 법들, 예를 들면 사학재단이나 건설개발 같은 법을 발의하기도 한다. 법안 발의의 양 채우기에 재미 들린 국회의원도 많다. 법안의 ‘한자어’나 ‘일본어투’를 한글로 고친다거나, 실생활에 필요도 없는 임시정부 때 법안을 찾아 굳이 없애는 법안도 있다. 500만원짜리 벌금을 1000만원 정도로 올려놓는 벌금 상향 법들도 수두룩하다. 대체로 이렇게 재미를 본 의원들은 비슷한 법안을 계속 발의하곤 한다. 그리고 자신의 선거 공보에는 ‘부지런한 국회의원’임을 뽐낸다. 그래도 4년마다 심판이 기다리니 일도 많이 한다. 법안 중에는 사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부분들을 잘 보살피는 좋은 법안도 많고 꼭 필요한 법도 제법 많다. 다만 파행이 잦았던 20대 국회의 법안은 좋든 나쁘든 대다수 계류 상태다. 악법도 법이라던데 계류 중인 법은 법도 아니다.

일 안 하고 노는 국회를 ‘식물국회’라고 하지만 듣는 식물은 기분 나쁘다. 식물은 놀지 않는다. 추운 겨울을 견뎌 뿌리를 보듬어 살아남는다. 생존과 번식을 위해 꽃을 피우고 벌, 나비를 매혹해 족적을 남긴다. 무엇보다 맛있는 열매와 아름다운 꽃으로 인간 삶에 이롭다. 코로나19로 모든 것이 다 폐허 같아도 봄은 꽃을 통해 왔고 사람들은 꽃을 보고 위로를 받는다. 21대 국회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저 식물들 같기만 하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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