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형제가 그린 유관순과 김구

2020.08.10 03:00 입력 2020.08.10 03:02 수정

작년인가 남대문에 있는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에 들렀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대형 작품이 눈에 띄었다. 김인승이 그린 ‘봄의 가락’이었다.

하수정 북유럽연구소 소장

하수정 북유럽연구소 소장

멋들어진 신사가 첼로를 켜고 이를 감상하는 한 무리의 관객을 그린 그림이다. 은은한 빛이 비치듯 명암이 살아있는 데다 등장인물마다 늘씬하고 그윽한 눈에 오뚝한 콧날이 어찌나 예쁜지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갖가지 색 한복을 입고 쪽진 머리에 음악을 감상하는 여성 중에는 가만히 턱을 괴고 지긋이 연주자를 응시하는 이도 있고 음악에 집중하려 눈을 감은 이도 있었다. 가르마 탄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 넘긴 남자 관객은 깃만 내놓은 셔츠와 스웨터 차림으로 세련미가 넘쳤다. 연주자의 의자 뒤에 걸쳐 놓은 외투며 주름이 흐르는 한복 치마 아래 슬리퍼를 보니 실내 공연인 듯싶었다. 1942년 작이면 해방 전인데 그 시대에 이 정도의 여유를 누리는 이들은 누구일까? 그림을 다시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런데 등장인물 중에 한국 사람으로 보이는 이가 없었다. 마치 명절에 외국인이 한복 입고 나오는 프로그램 속 장면 같기도 했다.

지난해 북서울미술관에서 ‘근대의 꿈’ 전시가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주요 근현대 작품을 전시했다. 거기서 김인승의 작품을 다시 만났다.

김인승의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서명 때문이었다. 나는 작품을 보면 작가의 서명을 유심히 보는 습관이 있다. 작가마다 이름을 쓰기도, 이니셜을 쓰기도 하는데 대부분 초기작부터 말년까지 서명이 바뀌지 않는다. 그런데 김인승의 작품은 시대별로 서명이 제각각이었다. 도쿄미술대학 재학 전후로 김인승의 일본식 발음인 ‘Jinsho Kin(진쇼 킨)’으로 써 놓은 것도 있고, 김인승의 창씨개명 후 이름인지 ‘金城仁承(가네시로 진쇼)’인 것도, ‘Kaneki(카네키)’라고 쓴 것도 있었다. 해방 후에는 ‘Kim Insoong’ 또는 ‘Insoong Kim’이라고 쓴 것이 많았다.

제작연도도 이상했다. 화가들은 서명 아래 작품을 그린 연도를 쓰는 경우가 많은데 ‘2602’ 이렇게 미래의 연도를 표기한 것이다. 알고 보니 한국에서 단군기원 연도로 단기를 표시하듯 일본 초대 ‘천황’ 즉위 시점을 원년으로 삼는 황기(皇紀)를 표기한 것이었다.

대한민국 근대미술계의 손꼽히는 서양화가답게 빛에 대한 이해와 정교한 칠은 변하지 않았지만 시기마다 달라진 서명만큼이나 그림의 주제도 크게 달라졌다. 해방 전까지는 주로 아름다운 여인을 그렸다. 부유한 화가였던 그는 따로 모델을 두고 그렸는데 초기에는 서양인을 모델로 한 그림이 많다. 이후에는 한복을 입은 여성도 그렸는데 얼굴만은 여전히 깊은 눈에 자로 잰 듯 날카로운 콧날의 서양 여성이었다. 1933년에 그린 그의 자화상을 보면 머리 모양이며 스카프까지 얼마나 세련되었는지 작품만 봐서는 시대를 알 수가 없을 정도다.

김인승은 도쿄미술대학을 졸업하던 1937년 조선미술대전에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했고 그 후 연속 4회 특선을 거머쥐며 선전의 대표작가로 활동했다. 1940년 일본 문부성이 주최한 ‘황기 2600년 봉축기념전’에 출품해 입선하기도 했다. 김인승은 ‘미술보국’, 즉 몸은 비록 후방에 있지만 성스러운 전쟁을 미술로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한 친일 미술인 모임 ‘단광회’의 핵심 회원이었다. 조선 청년의 일본군 강제동원을 기념하는 대형작품 ‘조선징병제실시기념화’ 제작에도 앞장섰다.

해방 후 김인승은 이승만부터 박정희까지 대통령 초상화를 그렸다. 서울 정동길에 있는 유관순기념관의 유관순 열사 영정도 그렸다. 김인승은 대한미술협회 이사장, 이화여대 미대학장 등 여러 직위를 두루 역임하다 1974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 시기부터 인물화 대신 꽃을 그리며 ‘장미화가’로 널리 알려졌다.

김인승에게는 형만큼이나 뛰어난 동생이 있다. 조각가 김경승이다. 형 김인승과 비슷한 궤적으로 살아온 김경승 역시 도쿄 유학 후 한국으로 건너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수차례 수상했다. 대표적 친일 미술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 위원으로 1944년에는 일제의 전쟁을 찬양하는 ‘대동아 건설의 소리’라는 작품을 내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그 역시 작품의 주제를 바꿨다. 가끔 산책 길에 마주치는 남산공원 김구 선생 동상이 김경승의 작품이다.

두 형제의 기예가 뛰어나다는 데는 누구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다만 대한의 청년에게 일본을 위해 싸우라고 외쳤던 이들이 유관순을 그리고 김구를 조각하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 참 궁금하다. 올해가 유관순 열사 순국 100주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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