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에 대한 기초적 성찰

2020.10.10 03:00 입력 2020.10.10 03:02 수정

역사는 봉건제 타파의 여정
현실은 특수계급인 자본이 지배
차별금지법은 최소한의 안전장치
새로운 사회체제 구상으로
법 제정의 근본 원인부터 없애야

국민 10명 중 9명이 찬성하는 차별금지법은 제정되어야 마땅하다. 인류의 역사는 자유와 평등을 쟁취하기 위한 오랜 여정이었다. 종적 질서에 기반한 봉건주의 타파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세계 최초의 정치학 교과서를 쓴 아리스토텔레스조차도 노예와 여성은 정치참여를 할 수 없는, 합리적 이성이 결여된 존재로 본다. 남성과 여성을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로 분리한다. 내성외왕의 윤리를 구축한 공자 또한 <논어>에서 “여자와 소인은 다루기 어렵다. 가까이하면 불손해지고 멀리하면 원망을 한다”는 말로 당대의 질서를 추인한다.

원익선 교무·원광대학교 평화연구소

원익선 교무·원광대학교 평화연구소

봉건제 최고봉인 절대왕권은 혁명, 제국의 지배, 국력의 쇠퇴 등으로 몰락했다. 전제정권들은 자발적으로 권력을 내려놓지 않았다. 한국의 경우, 19세기 말 동학농민혁명을 통해 비로소 만민평등의 깃발을 올렸다. 왕권국가의 한계는 백성의 권익 침해에 대해 국가의 시정을 청구하는 권리가 인정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동학도들이 이를 요구했음에도 처절히 짓밟힌 것은 이 때문이다. 세계 모든 국가의 헌법에 평등권을 명기한 것은 이러한 피의 역사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헌법 11조 1항의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이 한 구절이 주는 의미가 얼마나 무거운가.

그러나 헌법에서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우리는 현실적으로 이 제도에 지배받고 있다. 자본주의다. 로마의 스파르타쿠스나 고려의 만적이나 미국의 쿤타킨테의 한이 자본과 노동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세계 곳곳에서 넘쳐흐른다. 오늘날 돈의 지배를 받지 않는 영역이 어디에 있는가. 돈은 육체와 영혼을 쌍끌이 하고 있다. 국가는 기껏해야 외국에 대사관이나 영사관을 설치할 수 있지만 자본은 원하는 곳에 자신의 왕국을 건설할 수 있다. 그리고 수많은 차별을 양산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비정규직 내에서도 무기직, 계약직, 파견직, 기간제 등. 이마저 밀리지 않기 위해 계급 내에서도 투쟁한다. 여성은 여전히 차별받고 있으며, 젊음은 자본이 맘껏 골라 쓰는 소비재에 불과하다. 편견이나 다수, 가진 자에 의해 소외되고 차별받는 장애인, 외국인이주자, 소수자, 피고용인, 임차인 등도 구석진 곳에서 눈물 흘리고 있다. 사회적 정의를 애타게 찾는 눈물이다.

따라서 도리에 따른 실질을 다룬다는 의미로 쓴 정명(正名)이 요구된다. 평등의 적극적 구현 장치이자 무도한 이 세상을 바로잡는 ‘차별금지법’이라는 이름이 필요하다. 나는 이 법의 별명을 베두인법이라고 부르고 싶다. 베두인은 사막에서 길 잃은 나그네를 극진히 대접한다. 그 이유는 자신도 언젠가 사막에서 같은 처지에 놓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막에서 길을 헤맨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동학에서 돈이든 지식이든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서로 돕는 유무상자(有無相資)의 공동체를 추구한 것도 같은 이치다. 봉건제 타파를 외치고 나온 근대의 한국 종교들은 이러한 평등의 정신을 구현하고자 했다. 서양의 종교들 또한 평등의 가치에 매료된 서민들의 안식처였다.

이처럼 종교 공동체가 각광받은 이유는 차별 없는 세계 때문이다. 성소 안에서만큼은 절대적 평등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밖의 현실은 냉혹하다. 자본의 판이 된, 능력에 따라 차별한다는 상대적 평등은 불안과 고통을 야기한다. 해소를 위해서는 생존권 보장이 핵심이다. 북유럽 국가의 행복지수가 높은 이유는 사회보장제도 때문이다. 팬데믹은 최소한의 행복 조건인 주택, 의료, 직장, 여가가 보장되는 이 제도에 우리를 눈뜨게 하고 있다. 길거리로 나앉고 있는 서민들은 ‘빨갱이’ 소리만 듣지 않는다면 평등을 기축으로 하는 사회주의나 사회민주주의를 열렬히 환영할 것이다. 자본의 지배가 아닌 자본을 지배하는 사회적 합의를 이룰 수는 없는가. 아무나 1%에 속할 수 없다. 나머지 99%를 위한 새로운 사회를 구상하는 것이야말로 차별금지법을 사문화시키는 근본 처방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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