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개혁이 추·윤 싸움이 된 이유

2020.12.07 03:00 입력 2020.12.07 03:02 수정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언제로 돌아가면 이 상황을 막을 수 있을까? 추미애 장관을 임명하던 그때? 아니면 조국 장관을 임명했을 때, 윤석열 총장을 임명했을 때, 양정철이 윤석열을 만나 총선 출마를 권유했던 그때, 윤석열이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그때? 이것이 역사적 필연이었다면, 노무현 대통령이 검사들과 대화하려고 했던 그때일까? 어쩌면 김영삼 대통령이 하나회를 척결해서 유일한 초법적 권력을 검찰이 독점하게 되었던 그때, 아니 유신헌법을 기초한 김기춘이 박정희에게 김똘똘이라는 칭찬을 들으며 검찰이 군사독재의 하수인이었던, 그때였을까?

이관후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이관후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나한테 왜 그랬어요? 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 지금의 이 사태는 본질적으로 힘과 힘의 싸움이라 어떤 절차나 합리적 중재가 끼어들 틈이 없다. 징계위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 법적 다툼에서 어떤 판결이 나오든, 어느 쪽도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일 리가 없다. 이것이 ‘싸움’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룰이 없기 때문이다. 격투기에도 물어뜯으면 안 된다든지 급소를 공격하면 안 된다든지 하는 최소한의 규정이 있다. 그러나 작금의 상황은 심판이 없는 전쟁과도 같은 싸움이라, 영화 <달콤한 인생>의 결말처럼 어느 한쪽이 쓰러지거나 파국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검찰은 법으로 가능한 모든 권한, 사실상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한으로 정권의 행위와 사람들을 파헤칠 것이고, 권력 역시 출혈을 감수하고 버티는 수밖에는 없다. 검찰개혁을 하고자 했다면 감수해야 할 일이고, 자칫하면 정권을 내놓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 정도의 결기가 없이 시작했다면 오히려 그게 무모한 일이다.

이 싸움에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군부가 권력을 잃은 이후, 모든 정권과 검찰은 5년 주기로 사실상의 연립정부를 세우고 무너뜨리며, 줄서기와 줄세우기, 충성과 배신을 되풀이해왔다. 검찰은 정권의 편의를 적당히 봐주면서 자신의 자율성을 획득했다. 서로 필요에 따라 불편한 부분들을 덮어줘 가면서 ‘적대적 공생관계’를 형성했다.

이 고리를 처음 끊으려고 한 것은 노무현이었다. 품었던 정의감만큼 그는 순진했다. 평검사들은 공개적으로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을 조롱하고 비웃었다. 법에 명시된 검찰 인사권을 행사했던 강금실 법무장관은 송광수 검찰총장의 팔짱을 끼고 화해했고, 그전까지 관례에 불과했던 총장의 인사협의권을 법을 바꿔 명시해주었다. 퇴임한 노 대통령의 생사를 손에 쥔 것은 검사들이었다.

조국 장관이 임명되던 시점으로 돌아가 봐도, 정권 입장에선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을 것이다. 검찰총장은 대통령의 인사권을 사실상 무력화시켰다. 입법부의 청문 절차라는 것이 검찰의 수사권에 비해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정치에서는 상대가 먼저 건 싸움을 회피하면 지는 법이다. 정권은 추미애로 맞섰다. 장관과 총장, 두 사람의 스타일상 파국은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불가피하지 않은 측면은 이런 것이다. 윤석열이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 그는 개인주의자나 자유인이 아니었다. 이제는 모두 알지만, 그의 말은 ‘나는 사람이 아니라 조직에 충성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선출된 권력으로부터 검찰의 독립성은 반드시 수호되어야 할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철저한 검찰주의자인 그를 여당이 ‘우리 편’이라고 생각한 것은 지나치게 순진한 것이었다.

추미애나 윤석열 모두 자의식이 강하고 공명심이 큰 사람들이다. 그들의 언행을 보면 자신들을 특정 조직이나 가치의 화신으로 여기고, 그래서 선의를 품은 이상 무엇이든 해도 되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강 대 강으로 부딪쳐야 승부가 난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이것은 단순한 오락용 스포츠 경기가 아니다. 엄연히 국민이라는 관객이자 심판자가 있는 게임이고, 국민의 지지를 잃으면 어려운 게임이다. 요컨대 검찰개혁이라는 말이 사라지고 ‘추·윤 싸움’이라는 용어가 일반화되기 시작한 순간에, 이 싸움은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이 싸움은 선출된 권력과 독립성을 보장받아야 할 조직이 극단적으로 대립하자고 마음먹으면 결과는 파국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로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공수처의 필요성을 역설할 수는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러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큰 사석 작전이었다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겠지만, 지금으로선 그것이 최선이다.

다만 문제는 이제 보궐선거가 코앞이고 대선도 1년 반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정부 여당이 어디선가 이 실수를 만회하지 않으면, 세상은 다시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촛불 이후 처음, 승부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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