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세이 성남

‘안 산 사람, 안산 사람’.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당시 경기 안산시에서 출마한 후보에게 제시했던 홍보문구다. ‘토박이론’을 내세우는 후보라는 데 착안해 뜨내기와 토박이를 띄어쓰기로 구분했다. 문구를 만들어놓고 쾌재를 불렀던 기억이 있다. 초창기 지방선거라는 게 그랬다. 특별한 공약이나 정책으로 승부하기보다 ‘토박이론’을 들먹이는 후보가 부지기수였다. 호남에서라면 그저 DJ와 함께 찍은 사진 한 컷이면 당선은 따놓은 당상인 시절이었다.

최준영‘책고집’ 대표

최준영‘책고집’ 대표

물론 그렇지 않은 곳들도 있었다. 일테면, 1960년대 이후 도시 빈민들이 모여 살았던 상계동·성남 등의 산동네나 1990년대에 조성된 분당·일산 등의 신도시가 그런 지역이었다. 산동네와 신도시는 극단의 대비에도 불구하고 공히 지방자치에 새바람을 불어넣었다. 그중에서도 성남은 특별하다. 산동네와 신도시가 공존하는 곳이어서다. 현대사 집필에 열정을 쏟고 있는 강준만 교수가 <강남, 대한민국의 낯선 자화상>에 이어 또다시 도시와 공간에 대한 담론을 풀어낸다면 그 대상은 필시 성남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달 초 경찰이 성남시청과 산하기관에서 동시다발로 압수수색을 벌였다. 은수미 선거캠프 사람들이 시와 산하기관에 대거 채용됐다는 제보에 따른 수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미 한 차례 소송에 휘말렸던 은수미 시장이 다시 한번 구설에 올랐다. 왜 하필 성남이고, 연거푸 은수미일까? 누군가의 음해인가, 진짜로 문제가 있는 건가? 예단은 금물일 터. 현시점에서 할 수 있는 건 성남이라는 도시의 특성과 은수미 시장의 정치역정을 들여다보는 것쯤일 테다. 어쩌면 거기 답이 있을지 모른다.

은수미 시장에 대해선 개인적 소회가 있다. 2012년 평택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를 위한 시민사회 연대시위 때 노동운동가 은수미를 처음 봤다. 공장 옆에 자리 잡고 철야농성을 준비하고 있을 때 그가 단상에 올랐다. 해고노동자들의 잇따른 죽음을 애도하며 시작한 발언은,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결의로 마무리됐다. 말이 곧고 발랐다. 강단이 있었고 그 강단이 미더웠다. 탁월하고 열정적인 노동운동가 은수미가 어인 이유로 정치권에 투신하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한 번의 비례의원과 한 번의 낙선에 이어 절치부심 성남시장에 당선됐다는 사실을 알 뿐이다. 그리고 지금 위기에 처했다.

이어서 성남이다. 성남은 다양한 정치실험과 성공신화가 응축된 실험과 신화의 공간이다. 구도심과 분당(1기 신도시)이 어깨를 맞대었고, 판교(2기 신도시)가 더해져 ‘그랜드 성남’을 정립(鼎立)했다. 구도심에선 시민사회운동이 왕성하게 전개됐고, 진보당의 본류인 ‘경기 동부’의 본거지 역시 성남이다. 거대 여당의 원내사령탑 김태년 의원도 성남에서 잔뼈가 굵었다. 모름지기 성남은 경기도의 정치 1번지다. 최다 인구를 자랑하는 수원은 아직도 선거철이면 후보의 출신 고교를 따지는 등 토박이론의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유력 대선주자 이재명의 정치적 밑천 또한 ‘재선 성남시장’이다.

다음은 86정치인과 이재명이다. 은수미 시장에게선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이재명 경기지사가 다 보인다. 은 시장은 86운동권, 그중에서도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출신이다. 자연스레 조국을 비롯한 소위 86정치인들과 연결된다. 한때는 기대와 설렘의 대상이었지만 지금 그들에겐 경고음과 우려의 소리가 빗발친다. 도덕적 우위를 잃은 대신 기득권 이미지만 얹혔다. 이쯤에서 이재명 지사를 호출하지 않을 수 없다. 86정치인과는 결이 다르다. 은 시장이 선택해야 할 건 무엇일까.

정치(politics)는 도시국가를 뜻하는 폴리스(polis)에서 유래했다. 정치는 공간의 일이면서 ‘장소성’의 예술이고, 다양한 사람들의 욕망이 분출하고 부딪는 삶의 전장이다. 은수미 시장의 정치실험은 이제 시작이다. 성남이라는 도시의 역사성과 현실에 대한 깊이 있는 공부를 주문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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