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기의 추억

2021.03.18 03:00 입력 2021.03.18 03:03 수정

#1기 신도시. 1989년 노태우 정부는 분당·일산 등 5곳에 200만호의 베드타운 계획을 전격 발표했다. 곧 예정지는 투기장이 되었고 심각한 사회문제에 대대적인 수사로 무려 1만3000명의 투기꾼이 적발되고 비리공직자 131명을 포함해 987명이 구속되었다.

구재이 한국납세자권리연구소장 세무사

구재이 한국납세자권리연구소장 세무사

#2기 신도시. 2003년 노무현 정부는 동탄·위례 등 12곳에 신도시 계획을 전격 발표했다. 다시 투기가 극성을 부리자 대대적인 수사로 투기꾼에게 개발정보를 준 공무원 27명 등 무려 투기꾼 1만5000명이 입건되었다.

#3기 신도시. 2018년 문재인 정부는 하남·과천 등 6곳에 신도시 계획을 발표했다. 이상하게도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1·2기와는 달리 2년 넘게 조용했다. 지난 2월 뒤늦게 광명·시흥에 7만호 신도시를 추가 발표하자, 한 달 만에 LH 투기사건이 터졌고 뿌리 깊은 투기 복마전의 일각이 다시 드러나고 있다.

한국의 신도시는, 늘 집값 폭등으로 출발해 대출이나 중과세 등 수요규제를 대책으로 내놓았다가 부동산시장과 언론의 공급 확대만이 정답이라는 집요한 요구에 굴복한 결과물이다. 그런데 엄청난 국가자원과 사회적 비용을 들인 신도시는 집값 안정은커녕 불법전매, 부정청약, 집값담합 등 불법행위를 일삼는 투기꾼들의 먹잇감이자 놀이터로 전락했다.

한국의 주택 보급 등 부동산 상황은 나쁜 편이 아닌데도, 왜 한국만 집값 폭등이 사회문제가 되고 부동산투기가 만연할까. 부동산에 국민 재산의 76%가 몰려 있고 GDP의 5배나 된다는 특성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강남불패’라는 말처럼 한정된 주택시장에서 실수요 아닌 투기수요를 무제한 허용하다 보니 국민의 주거권이 심각하게 침해되어 생겼다.

문재인 정부도 집값 폭등에 ‘역대급’ 금융규제와 중과세는 물론 신도시 계획에 도심 고밀도 공공개발 방안까지 내놓았다. 하지만 공공주택 공급을 맡은 LH 공직자들까지 뛰어드는 뿌리 깊은 투기에 대한 안일한 상황인식으로 결국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백약이 무효요, 진퇴양난인 상황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50년 부동산투기꾼과 비호세력을 영원히 축출할 흔치 않은 기회도 맞았다. 투기로 불로소득을 올리고 개발정보로 국고를 축내는 이들에게 적용할 이해충돌방지법 등 입법적 개선은 물론, 지긋지긋한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부 조직과 정책을 혁신적으로 재편해야 한다.

우선, 주거복지정책을 전담할 ‘주거복지부’나 ‘주택청’ 같은 중앙행정기관을 만들어야 한다. 국토부의 주거정책과 LH 주택공급 기능을 떼내 주거복지정책의 컨트롤타워로 삼아 공공성을 중심으로 주택시장을 통괄시켜야 한다. 주거복지정책을 국정의 중심에 둘 때가 되었다. 임직원 9500명, 자산 184조원의 거대 조직에 정부 대신 주택정책을 총괄해온 LH는 기능 대부분을 정부로 넘기고 해체해야 한다. 정책은 중앙부처, 집행은 지방청 등 집행조직으로 이관하되 인원과 기능은 대폭 재조정하고, 도시재생 등 여타 업무는 지방공사로 넘긴다.

핵심은, 망국적 투기를 예방할 방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 투기 종식을 위해서는 경기부양 수단으로서 부동산시장을 포기하고 사후적 안정화 방안이 아닌 사전적 시장감독기구를 두어야 한다. 상설감독기구는 거래 분석이나 하는 ‘부동산거래분석원’이 아니라 금융·자본시장의 금융감독원처럼 시장 관리와 감독 기능을 갖춘 ‘부동산감독원’이 더 적합하다. 정녕 투기를 근절하고자 한다면 비상한 특단의 대책이 되어야 한다.

남의 일 같았던 부동산투기가 우리 국민들의 문제가 되었다.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각해진 지금, 땀 흘려 일한 보람과 우리 사회가 지탱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정이 확보될 수 없다면 대부분 투기 탓이다. 매번 수사와 처벌이 반복되었지만 투기세력과 그들의 이익은 더 커졌다. 지금이 국민과 정부가 힘을 합쳐 익숙한 ‘투기의 추억’과 진짜로 절연할 절호의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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