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의 선의

2021.03.31 03:00 입력 2021.03.31 03:02 수정

수년 전 일이다. 토요일 오후, 동네 미용실에서 잡지를 뒤적이다 한 원로 여배우의 인터뷰 기사에 닿았다. 구호단체 홍보대사로서 아프리카 기아현장에서 찍은 사진들로 모금전시회를 준비하는 내용이었다. 해외선교나 봉사를 가서 굶주림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현지아이들을 끌어안고 환하게 웃는 유명인의 화보는 가장 싫어하던 것 중 하나였다. 더욱이 그 배우가 표상해온 자애로운 모성상을 불편하게 여겼던 터라 읽기 전부터 반발심이 솟았다. 예상대로 그분은 아이들이 저러는데 혼자 고급호텔 가서 자는 게 미안해 울었다는, 틀에 박힌 ‘착한’ 말씀을 하셨다. 난 머리에 ‘구루프’ 돌돌 만 채 자꾸 마음이 삐딱해지려 했다.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인터뷰를 진행하던 기자도 비슷한 심정이었는지, 뒤이어 조금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불평등과 빈곤은 단발성 봉사로 해결할 수 없는 전 지구적인 문제인데, 잠시 동안의 선의는 어떤 면에선 무책임하지 않겠냐고 말이다. 그런데 이번엔 그분의 답변이 예상과 달랐다. 문구를 정확하게 복기할 순 없지만 이런 말씀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맞아요. 이걸로 세상이 바뀌진 않아요. 체계적이고 구조적인 변화가 필요한 거, 당연히 맞죠. 그렇게 되길 저도 진심으로 바라요. 근데 그건 제가 지금 당장 어떻게 못해요. 오늘 한 명 더 먹고 입게 하는 데엔 뭐라도 하나 보탤 수 있으니까 일단 저는 한 명 더 먹이고 입힐래요.” 차갑게 비웃던 심장에 더운 물이 끼얹힌 기분이었다.

이 기억이 떠오른 것은 올해 초 “커피 한잔 부탁한 노숙인에게 점퍼와 장갑까지 건넨 시민”(한겨레·1월19일자) 화보기사가 세간의 화제가 되면서였다. 소낙눈 내리던 서울역광장에서 한 남자가 입고 있던 방한 점퍼를 벗어 노숙인에게 입혀주며 장갑과 5만원권 지폐를 건네는 장면이 기자의 카메라에 포착돼 보도되었다. 기사는 많은 이들에게 뭉클한 감동을 주며 널리 공유되었다. 다소 시간이 지난 후 일각에선 선한 누군가 건넨 도움의 손길을 미담화하여 소비하는 데 그치는 일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들이 일었다. 개인의 온정에 기대어 유지되는 공동체의 온기는 체제와 자본의 모순을 도리어 은폐할 수 있다는 논지였다.

빈곤과 부조리를 미담으로 덮으려는 사회가 문제적이란 데에 동의한다. ‘신사와 노숙인’으로 대비되는 이미지가 자칫 후자를 온정에 감사해야 할 수혜자로 박제화할 수 있음도. 아름다운 한순간을 이렇게나 많이 기억하며, 우리가 어제와 다음날의 서울역은 마치 없는 것인 양 착각할 가능성도. 문제의 원인을 치열하게 파고들어 투쟁해야 할 사안에서 약자를 동정하는 데 그치게 만드는 ‘분노 없는 연민’은, 문제의 원인으로 악인을 지목하고 그에게 분노를 터뜨림으로써 손쉽게 정의감을 얻는 ‘연민 없는 분노’와 동전의 양면을 이룰 것이다. 그럼에도 난 이 ‘미담’에 냉소할 수 없었다. 선의가 하나 더해진 세상이 그것마저 제하여진 세상에 비해 그 크기만큼은 나을 거라 생각해서다. 설령 이를 통해 부당하게 가진 자들이 회개하거나 너무 가진 자들이 호주머니를 열거나 서울역 노숙인을 향한 시민들의 시선이 이내 바뀌거나 하지 못하더라도, 찰나의 선의는 그 자체로 귀하며,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낫다.

주말마다 요양기관 가서 일손을 거든 적이 있다. 걸레질하고 설거지하는 동안 속으로 ‘이 깨끗해진 창틀과 말갛게 씻긴 그릇만큼의 기쁨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선물해주세요’ 기도하곤 했다. 이기적인 데다 신과의 거래 혐의마저 짙은 봉사심. 그래서 부끄러웠으나 그렇다고 그 시간들을 후회하진 않았다. 때 묻은 마음으로나마 창틀 말끔히 닦고 식기를 가지런히 담아둔다면 적어도 그만큼은 진심 어린 봉사자들의 일을 덜어준 셈이 되니까. 이 경우는 선의조차 아닌 위선일 테지만, 착한 척한다고 비난하면 달게 받겠다. 난 냉소보다 차라리 위선을 택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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