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눈사태에서 만난 얼레지들

[이굴기의 꽃산 꽃글]5월의 눈사태에서 만난 얼레지들

저녁은 밤과 새벽을 거쳐 아침으로 연결된다. 그게 순서다. 4월 다음에는 당연히 5월이다. 요즘 역주행하는 노래들이 있다는데 여름의 입구에서 겨울로 거꾸로 달리는 날씨인가. 봉평에 일이 있어 갔다가 뜻밖의 눈 소식을 들었다. 그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대관령으로 달려 능경봉에 올랐다. 눈이 소복하게 거짓말처럼 쌓여 있었다. 눈도 나무도 사람도 이 예기치 않은 사태에 어리둥절해하는 것 같았다.

천하의 계절에 춘하추동이 있듯 꽃들에게도 피는 차례가 있다. 최근 그 개화 순서가 많이 변했다는 소리가 들린다. 때를 맞추지 못한 불시화가 있는가 하면 꽃들이 일거에 피었다가 일시에 진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꽃대궐의 계단 한 귀퉁이가 허물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기후변화의 한 전조가 이리도 생생하게 들이닥치는 것인가. 눈사태에 놀란 건 그 무엇보다도 어린 꽃들이었다. 기다릴 대로 기다렸다. 순서를 지키며 이제 피어난 꽃들이 모두 납작하게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놀라운 눈을 맞아 꽃들의 신상에 잠깐 변화가 생겼다. 고개를 숙인 건 갈퀴현호색, 홀아비바람꽃, 금괭이눈, 개별꽃 등등. 특히 얼레지는 그 활짝 피었던 꽃잎들이 모두 꽃봉오리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세상을 향한 포부를 담은 최초의 꽃봉오리가 아니라 공중의 습격을 받아 겁먹은 표정으로 눈을 뒤룩뒤룩 굴리는 꽃봉오리들.

완만한 경사의 길을 오를 때 바닥은 이미 질펀해지고 있었다. 하늘은 이렇게 흰옷을 보내주는데 지상에서는 한나절이 가기도 전에 홀랑 더럽히고 있었다. 정상에 조금 못 미친 한갓진 곳에 이르렀다. 스펀지 같은 눈의 부피가 모든 소리를 빨아들여 세상의 가장 깊은 적막이 내려앉은 곳에서 문득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겉만 보면서 표면에서 산다. 제아무리 첨단의 장비를 동원해도 존재하는 것들의 모든 외부를 동시에 볼 수가 없다. 당장 눈앞의 물체는 뒤에, 배후에 그 일부를 내주어야 한다. 오늘 갑자기 내린 이 5월의 눈은 대체 무슨 징조의 그림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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