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륙도 고개를 넘으며

[이굴기의 꽃산 꽃글]오륙도 고개를 넘으며

거창에서 자라나 부산으로 나와서 문현동(門峴洞) 고개 너머 대연중 그리고 동래고를 졸업하고 서울로 와서 대학 마친 뒤, 쫓기듯 사회로 진출해서 몇 개의 우회로를 거쳐 파주 심학산 아래에 정착한 게 한 줄로 요약한 그간의 내 이력이다. 그사이 뾰족한 시간들이 마구 들이닥쳐 서른의 급경사, 마흔의 깔딱고개, 오십의 반고비를 차례로 넘었다.

미로 같은 골목에는 단골집도 많아서 호프집 문지방을 닳도록 드나들던 어느 날의 회심 끝에 산으로 발길을 돌린 건 아무리 생각해도 잘한 일이다. 머리가 하얗게 번질 무렵, 노랗고 붉고 흰 꽃들에게 홀딱 넘어간 것은 더욱 잘한 일. 자연의 꽃은 교과서에서 배운 지식으로서의 꽃이 아니었다. 세상의 마무리를 담당하는 꽃들, 그 안에 질서 있게 어울린 암술과 수술과 꽃가루. 관찰할수록 세계의 피부가 아연 두툼하고 풍성해졌다. 풀과 나무들과 정교하게 서로 비비면 그 사이에서 경건한 즐거움이 딸과 아들처럼 뛰어나왔다.

주로 강원도의 산을 헤매다가 부산 바닷가로 가는 날도 있었다. 나의 이력을 감안한 꽃동무들이 이기대 너머 해파랑길로 안내한 것이다. 참 오랜만의 오륙도 선착장. 그 옛날 조그맣던 내가 뛰놀던 곳이 관광지로 바뀌었다. “오륙도 다섯 섬이 다시 보면 여섯 섬이/(…)/ 돌아가 나도 어렴풋이 전하리라”의 시조는 중학교 때 배웠고, “꽃피는 동백섬에 (…)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의 노래는 고등학교 때 들었다. 오늘 새로 배운 건, 이 섬이 남해와 동해를 가르는 경계라는 사실이다. 이는 오륙도가 실은 바다에 있는 고개란 뜻이기도 하겠다.

허파꽈리의 주름을 펼치면 그 표면적이 운동장만큼이라고 한다. 지구가 축구공처럼 맨맨하다면 이 세상의 넓이와 깊이가 어디에서 비롯되랴. 해수면에서 산을 바라보면 지하 깊숙한 곳에서 누가 공중으로 찔러넣은 압침처럼 뾰족하다. 저 산은 얼마나 긴 고개를 감추고 있는가. 시간은 앞으로 어떤 고비를 준비하고 있는가. 나의 문명을 개척하는 발목에 지그시 힘을 주면서 남해에서 동해로 가는 고개를 또 힘겹게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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