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시화라는 말에 대한 생각

2021.06.22 03:00 입력 2021.06.22 03:03 수정

[이굴기의 꽃산 꽃글]불시화라는 말에 대한 생각

목포 앞바다에 떡 버티고 있는 압해도(押海島). 우리 국토의 최첨단에서 바다를 제압한다는 뜻을 실천하고 있는 호기로운 섬이다. 오래전, 한 해의 마무리 꽃산행을 압해도에서 했다. 바다 가운데로 풍덩풍덩 빠지는 기분으로 완만한 능선을 걸어가는데 뜻밖의 꽃이 눈길을 끌었다. 해풍에 몸을 맡기며 처연하게 피어난 건 진달래가 아닌가. 그때는 늦가을이라 꽃보다는 열매가 승한 시절이었다. 그런데 홀로 흔들리는 진달래의 꽃을 바라보자니 잠시 어리둥절했다. 이 꽃은 올해의 지각생인가 내년의 전령사인가. 바로 누군가 던진 한마디에 상황은 간단히 정리되었다. 불시화로다!

올봄부터 계절이 뒤죽박죽되었다는 소식이 여러 곳에서 전해졌다. 개화 순서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뒤바뀐 채 피어나기도 하고 한꺼번에 다투어 피기도 했다. 그리고 또 불각시에 들이닥친 역병의 기세가 생활의 질서를 마구 헝클어놓았다. 이 무슨 불길한 배후의 작용들인가. 그 여파로 이제는 꽃을 입에 물듯 모두 마스크를 쓰게 되었다. 사나운 시절 속에서도 이런 뜻밖의 생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마스크를 쓰면 모두 점점 몰두하는 사람, 궁리하는 인간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생각. 마스크가 단순히 입을 가리는 게 아니라 귀를 끌어당겨, 경청(傾聽)을 인간사의 무대 전면에 등장시킨다는 생각. 지하철에서 마스크 너머 눈망울을 굴리는 이들을 보면 어쩌면 그리도 젊은 꽃봉오리 같은가!

아무도 모르게 다녀가는 것도 있지만, 꽃들의 개화에는 엄연한 질서가 있다. 한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면 복수초, 바람꽃으로 시작해서 차례차례로 꽃들의 계단이 이어진다. 이 성숙한 꽃계단을 짚고 올라가면 하늘 끝에는 못 닿을지라도 한 해의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우리들의 얄팍한 생에 그나마 깊이와 향기가 있다면 이런 꽃내음이 두루 범벅되어 함께 어우러졌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미끄러운 표면에 산다. 피투성이로 이 세상에 내던져진 이래 영문 모른 채 살아가는 중이다. 불시화로 피어난 진달래 앞에서 어쩌면 이 지상에 불시착한 내 운명을 가늠해 본 오래전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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