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자를 먹여 살리는 사람은 누구인가

2021.06.03 03:00 입력 2021.06.03 03:03 수정

[창작의 미래] 창작자를 먹여 살리는 사람은 누구인가

“창작자를 먹여 살리는 사람은 누구인가?” 중요하지만 종종 뒷전에 밀리는 질문이다. ‘회사를 먹여 살리는 사람은 고객인가, 사장인가, 노동자인가’와 같이 길고 긴 입씨름이 벌어지는 일을 피하기 위해, 일단 ‘작품을 만들면 돈을 주는 사람이 누구냐’만 생각하자.

김태권 만화가

김태권 만화가

창작자에게 돈을 주는 사람은 두 종류다. 하나는 어려운 말로 패트런이라고 하는, 돈 많은 예술 후원자다. 다른 하나는 요즘말로 ‘내돈내산’(내 돈 내고 내가 사는)의 평범한 개인이다. 돈이 많고 적음으로 나눈 것은 아니다. 작품에 돈을 내는 사람과 작품을 향유하는 사람이 같냐, 다르냐로 나는 기준을 삼았다. 어린이책과 청소년책의 구분에서 빌려온 기준이다. 어린이는 아빠·엄마가 사준 하드커버 전집을 읽고 청소년은 용돈을 쪼개 산 책을 주머니에 꽂고 다닌다고 했다.

한때 우리는 개인이 자기 돈 내고 작품을 즐기는 일에 익숙했다. 책, 종이만화, 음반, 극장에서 보는 연극과 영화가 그랬다. 이 시절이 좋았다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이 작품을 지금보다 존중했다고 주장한다. 정말 그랬을까, 나는 조심스럽다. 텍스트를 존중했다기보다 평범한 개인으로서는 적다고만 할 수 없는 돈을 치렀으니 본전 생각이 나서라도 작품을 곱새긴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세상이 변했다. 사람들은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공중파 텔레비전과 유튜브 영상과 웹툰과 웹소설을 즐긴다. 창작자가 받는 돈은 대체로 포털과 플랫폼과 광고주에게서 온다. 오늘날 예술가의 패트런은 돈 많은 기업이다. 창작이 금력에 휘둘리게 되었다며 한탄하는 이도 있지만, 잘 생각해보면 예술은 오래전부터 그런 경우가 많았다. 고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인류 문화의 정수로 꼽는 고대 아테네의 연극이건 ‘빵과 서커스’라고 빈축을 사는 고대 로마의 공연이건, 갑부가 돈을 내고 평범한 시민이 즐겼다. 중세 서양에서는 돈 많은 교회가, 르네상스 시대에는 메디치 가문 같은 부유한 시민이 돈을 대고 창작자가 공공예술을 만들었다. 어찌 보면 오늘날의 창작 환경은 창작의 과거와 맞닿아 있다.

그렇다면 창작의 미래는? 예를 들어 NFT(대체불가토큰)는 어느 쪽 시장일까? 패트런 쪽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부유한 수집가가 “억” 소리 나는 경매가를 치렀다는 뉴스가 연일 화제다. 그런데 한편에는 ‘내돈내산’ 시장도 열려 있다. ‘디지털 농구 카드’로 불리는 NBA톱숏처럼 평범한 사람이 수집할 수 있는 NFT도 미국에 있다. 올 하반기에는 “NFT 대중화” 같은 말이 입에 자주 오르지 않을까, 창작자는 그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런 문제를 궁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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