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서린 좀비들의 역습

2021.08.13 03:00

넷플릭스 <킹덤: 아신전>의 한 장면.

넷플릭스 <킹덤: 아신전>의 한 장면.

2019년 1월,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로 공개된 <킹덤>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신선한 좀비물로 호평을 받았다. 단순히 새로운 시공간적 볼거리를 선사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좀비물은 태생부터 정치사회적 함의를 담은 장르였다. 이 장르의 선구자 조지 로메로 감독이 소비자본주의 사회의 욕망에 지배된 대중을 ‘살아 있는 시체’에 빗대면서부터, 좀비물은 그 시대의 사회적 조건에 대한 은유적 텍스트로 읽혀왔다. 어느 순간 재난 블록버스터의 형태로 주류 장르가 되면서 이 같은 사회적 메시지가 많이 희미해진 좀비물이, 2010년대 한국에서 신분제 사회 조선시대 사극으로 변주되며 장르의 태생적 성격을 뚜렷이 환기하게 된 것이다. 이 사회비판적 메시지야말로 <킹덤>을 향한 호평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김선영 TV평론가

김선영 TV평론가

<킹덤>의 비극은 조선의 끝, 가장 밑바닥에 자리한 백성들의 참혹한 삶으로부터 시작된다. 두 차례의 전란 뒤 대기근까지 찾아온 조선에서 권력층은 헐벗은 백성들을 수탈해 자기 배를 불리는 데만 급급했다. 깊고 깊은 궁궐 안에서 살아 있는 인간의 피와 살만 탐했던 좀비 왕의 병증은 지배 계급의 탐욕에 대한 비유 그 자체다. 왕의 괴질이 온 나라를 뒤덮은 역병 ‘생사역’으로 변이한 것은 왕에게 살해된 백성의 인육을, 굶주린 민초들이 그 정체도 모른 채 나눠 먹고 나서였다. 주목해야 할 점은 좀비로 변한 백성들의 모습이 생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데 있다. 누더기를 입고 산발을 한 채 인간을 물어뜯는 그들의 모습에서는, 좀비 왕의 탐욕과 달리 서글픈 생존 본능이 강하게 느껴진다. 잔혹한 수탈과 착취가 만들어낸 한 서린 좀비의 탄생이다.

극본을 쓴 김은희 작가는 지난해 공개한 <킹덤> 시즌2에서 이 같은 주제 의식을 한층 강화했다. 드라마는 조선의 끝 동래에서 확대된 생사역 재난에 앞서, 3년 전에 발생했던 슬픈 좀비의 역사를 풀어낸다. 조선 땅을 뒤덮은 첫 번째 전란 시기, 왕실마저 넘어갈 위협에 처하자 실세 영의정 조학주(류승룡)는 죽은 자를 되살리는 생사초의 비밀을 접하고 무서운 계획을 하나 세운다. 한센병으로 죽어가는 수망촌 환자들을 좀비로 만들어 침략자들과 싸우게 한다는 전략이었다. 생전에도 격리되어 멸시받던 수망촌 백성들은 비참하게 살해당한 뒤에도 좀비로 변해 지배층을 살리기 위한 도구로 이용당한다. 천대받던 약자들이 좀비가 되었다는 전작의 비극은 이렇듯 더 참혹하게 변주된다.

최근 공개된 시리즈 외전 <킹덤: 아신전>(이하 <아신전>)에 이르면 작가의 문제의식은 한 걸음 더 나간다. 조선의 남쪽 끝에서 북쪽 끝으로 배경을 옮기고 수십년 전을 거슬러 올라간 드라마는 생사초의 기원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더 밑으로 내려갈 수 없을 것 같았던 신분제 사회의 최하층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역사에서 존재마저 잊혀진 ‘성저야인’이라는 집단이다. 이들은 오래전 조선에 귀화한 여진족들로, 가장 추운 북쪽 땅 끄트머리에 격리된 채 살아갔다. 주인공 아신(전지현)은 이 성저야인의 마을인 번호부락에서 태어난다.

아신의 아비는 언젠가 조선의 관직을 받고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희망으로 위험한 밀정 노릇을 비롯해 험한 일을 도맡아 했고, 아픈 어미는 의원도 찾지 않는 곳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가난하고 어려운 삶이었지만 번호부락민들은 모두가 한가족처럼 의지하며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원인을 알 수 없는 대학살의 밤이 마을을 뒤덮는다. 그 참사 속에서 유일한 생존자가 되어 조선 관군의 노예로 살았던 아신이 학살의 진실을 깨닫고 난 뒤 복수의 화신으로 변한다는 것이 <아신전>의 주요 줄거리다. 중요한 것은 이번에도 좀비 재난 비극의 근원에 비참하게 이용당하고 학살당한 백성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이들이 “여진족도, 조선인도 아닌 멸시받는 천한 대상”이었다는 점에서 현실 비판적 메시지가 더 뚜렷해진다.

요컨대 시즌1에서 외전인 <아신전>에 이르기까지, 좀비 장르로서 <킹덤> 시리즈의 제일 의미 있는 성취는 갈수록 오락화되어가던 좀비 재난물에 장르 본질의 정치적 성격을 되돌려주었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는 공교롭게도 코로나19 팬데믹 시국과 만나면서 더욱 보편적인 메시지로 힘을 얻게 된다. 감염병에 대한 공포보다 약자를 향한 혐오와 차별의 바이러스가 더 공포스럽게 다가오는 시대에, 한 서린 좀비들의 역습은 서글픈 울림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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