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나의 주근깨

2021.08.14 03:00 입력 2021.08.14 03:02 수정

책상 앞을 떠나 잠시 쉬고 왔다. 여름의 따가운 햇볕을 온몸으로 받았더니 주근깨가 그새 더 많이 올라왔다. 까맣게 타버린 팔다리 그리고 얼굴에 잔뜩 올라온 주근깨를 볼 때마다 신나고 알찬 여름휴가를 보낸 것 같아 뿌듯하다. 솔직히 말하면 여름 내내 집과 회사, 가끔 남의 건물 회의실로 옮겨다니기만 했으면서 며칠 동안 주근깨 좀 만들었다고 신나는 여름이라니 기만인 줄 알면서도 그래도 주근깨를 볼 때마다 잠깐의 휴가를 떠올릴 수 있다니 행복하다. 시간이 지나면 또 옅어질지라도 당장은 몸에 추억을 새겨넣은 느낌이다.

김민지 풀뿌리 여성주의 활동가

김민지 풀뿌리 여성주의 활동가

주근깨를 처음 의식하게 된 건 친구의 하얀 얼굴 때문이었다. 그날따라 광대뼈 근처에 점처럼 콩콩 박힌 친구의 주근깨가 눈에 들어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친구는 자신의 주근깨를 좋아한다며 주근깨는 사람을 개구쟁이처럼 보이게 해준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호기심과 모험심이 많은 여자 주인공들은 주근깨가 있었다. 삐삐가 그랬고, 빨간머리 앤이 그랬다. 매력적인 여자 캐릭터들의 광대와 콧잔등에는 햇볕의 흔적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느 날 내게도 거뭇거뭇한 것들이 본격적으로 찾아왔다. 문제는 내 주변의 누구도 이걸 유쾌하게 봐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피부관리실로 나를 끌고 갔다. 돈도 내주지 않으면서 비싼 클리닉을 결제하라고 성화였다. 실장님 혼자만 상대한대도 나는 이길 자신이 없는데 엄마까지 합해 2 대 1로 싸우려니 내 지갑은 견딜 재간이 없었다. 여하튼 나는 돈을 썼고, 주근깨는 레이저와의 싸움에서 이겼다.

엄마는 더 이상 잔소리를 못하지만 한동안 큰이모가 이어받았다. 나만 보면 왜 선크림을 안 바르냐고, 피부를 관리하라고 성화였다. 이모는 그래도 가끔 보니까 견딜 만했다. 어떤 친구는 대놓고 피부과 진료를 권했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볼 때마다 말했으니 진심인 것 다 안다. 모두들 내가 외모를 고민하며 자존감을 잃어버리기를 바란 것이 아님을 안다. 그렇지만 내가 행복하길 바란다면 돈과 시간을 써서 깨끗한 피부로 돌아가라고 잔소리하는 것보다 내 피부의 변화에 관심을 끊어주는 편이 더 합리적이고 경제적이고 현실적이다.

만약 내가 친구의 이야기를 먼저 만나지 못했다면 훨씬 더 쉽게 유혹에 넘어갔을지도 모르겠다. 내 주변 세상이 이렇게도 나를 달달 볶아댐에도 불구하고 걱정하고, 돈을 쓰고, 효과를 기대하고, 다시 만날까봐 전전긍긍하는 태도를 갖지 않게 된 것은 다행히도 어릴 때 만난 친구의 공이 반 이상이다. 다른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의 존재는 이렇게나 고맙고 소중하다. 방송인 김나영이 주근깨를 드러내는 것도 고맙다. 다 본인의 주근깨가 맞고, 한때 싫어하고 걱정했던 것도 맞지만 이제 인정하기로 했다는 귀여운 고백이 그녀의 얼굴을 더 사랑스럽게 만든다. 그러니 철마다 등장하는 잡티 없는 피부를 만들라는 병원 광고나 연예인 누가 써서 효과를 봤다는 화장품 광고, 디자이너의 영혼까지 갈아넣었겠다 싶을 만큼 보정을 거듭해 만들어낸 연예인 화보를 이제 그만 만나고 싶다. 자연스러운 얼굴이 화면에 당연하게 더 많이 드러나고 얼굴에 뭐가 있거나 없거나 누구도 스트레스 받지 않는 여름이라면 행복지수도 더 많이 올라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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