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레

2021.12.13 03:00 입력 2021.12.13 03:01 수정
김정수 시인

[詩想과 세상]찔레

설악, 겨울 골짝을 걷다 찔레 덧가지를 얻었습니다

별빛에 얼어 낮달에 녹고 눈발에 얼어 저녁놀에 녹으며

풍경을 넘는 붉은 발가락, 억년을 걸었는지 뜨겁습니다

찾아오는 바람인 듯 돌아가는 꿈길인 듯 만해사에 드니

왕말벌 한마리 죽어 법당을 무덤으로 삼고 적막합니다

찔레, 말벌을 만나러 오던 먼먼 눈빛인지 약속이었는지

찬란한 그물에 걸리는 향기, 염주알로 익었습니다

서로에게 한짝 신발이었을 생, 고맙습니다 참 붉습니다

김수우(1959~)

강원 인제 내린천변에 있는 만해마을에 몇 번 갔다. 새벽에 일어나 안개 자욱한 천변을 걷기도 하고, 흐르는 찬물에 발을 담그기도 했다. 만해축전에 참가했을 땐 법고 두드리는 스님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기도 했다. 속세의 허물 다 벗어버리라 호통치는 듯한 법고 소리에 정신이 아뜩해졌다. 법고와 목어와 범종은 보았으되, 끝내 법당은 보지 못했다. 찔레와 말벌이 사는 줄도 몰랐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왔으니, 부끄러울 뿐이다.

시인은 “설악, 겨울 골짝을 걷다 찔레 덧가지”를 줍는다. 가지가 있는 자리에 겹쳐 생긴 덧가지는 필요없는 군더더기다. 하지만 세상에 소용없는 것이 있을까. 다 나름의 쓰임이 있을 터,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것이 삶 아니던가. “돌아가는 꿈길인 듯 만해사” 법당에 들어서니, 하필 “왕말벌 한마리 죽어” 있다. 시인은 순간 찔레가 “억년을 걸”어 말벌을 만나러 오고 있었다 생각한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서로에게 한짝 신발이었을” 인연을 시인이 맺어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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