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필요한 건 명랑함

2021.12.18 03:00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카드처럼//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김종삼,‘북치는 소년’ 전문)

한윤정 전환연구자

한윤정 전환연구자

성탄절이 다가오고 한 해가 저물어가면서 떠오르는 시 한 편.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았던 김종삼 시인(1921~1984)은 식민지, 전쟁, 가난과 독재의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고통 자체를 관망하면서도 낙관을 잃지 않았던 시인이다. 대표작 ‘북치는 소년’은 그의 시 세계를 요약하는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란 구절로도 유명하다. 가난한 아이는 누더기 옷을 걸치고, 소녀라면 어린 동생을 등에 업은 채 먹을 것을 찾아 헤맸을 터. 그러나 구호물자와 함께 이국에서 도착한 크리스마스카드의 반짝임을 보면서 아이는 잠시 현실을 잊고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 그야말로 초월의 순간이다.

더불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평범한 한국전쟁 참전 미군 루퍼트 넬슨(1931~)이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그는 한국전에 징집됐다. 1953년 1월, 인천에 도착해 1년여 강원도 화천 일대에서 포병으로 근무했다. 루퍼트는 일본 오키나와 미군기지로 휴가를 갔다가 구입한 독일제 카메라로 한국 풍경을 찍었다. 논농사에 관심이 많아서 모내기부터 추수와 타작까지 한 해의 농사를 기록했고, 무엇보다 가난하지만 순수한 아이들의 표정을 많이 남겼다. 나는 그가 65년간 간직해온 사진을 <헬로 코리아>(눈빛출판사, 2019)라는 사진집으로 내는 일을 도왔다. 수많은 죽음을 지켜보고 자신도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그의 시선에는 처음 이국땅을 밟은 스무 살 젊은이의 명랑함이 깃들어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명랑함이라 말하고 싶다. 어느덧 중년에 접어든 나이 탓인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면 더 이상 명랑하기 힘든 이유는 모든 인과관계가 보이기 때문이라고(보이는 게 맞는지 알 수 없지만) 한다. 내용으로 꽉 차 있어서, 더 이상 내용 없는 아름다움 같은 건 들어갈 자리가 없는지 모른다. 이것은 사람의 문제인 동시에, 한국사회의 현재이고 현대문명의 속성이기도 하다. 예측하고 계획하고 과정을 통제하고 빈틈을 메우는 문화에서 공정은 가능할지 몰라도 자유, 선택, 초월의 순간 같은 건 찾아오기 어렵다. 명랑함은 생명의 속성이고 생명은 빈틈에서 출현하는데, 갈수록 노쇠해지는 사회에서 명랑함은 유년기의 추억일 뿐이다.

최근 ‘다시, 생명운동’이라는 대화모임에 다녀왔다. 생명공학, 생명산업, 나아가 코로나19를 계기로 국가가 개인의 신체를 통제하는 생명정치가 전면화한 시대에 생명의 의미를 묻고 생명을 살리는 정치를 모색하는 자리였다. 그 뿌리는 1981년, 시인 김지하가 기초하고 사회운동가 장일순을 비롯한 원주캠프에서 함께 작성했던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 이른바 ‘생명운동에 관한 원주 보고서’이다. 모든 운동을 아우르는 생명 중심 세계관으로의 전환, 밥상공동체이자 영성공동체라는 초기 구상은 이후 한살림협동조합(1986), 한살림 선언(1989)으로 이어졌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지금은 마을공동체, 교육공동체, 돌봄, 평화, 유기농업, 복지, 주민자치, 정치학교, 사회적 경제 등 다양한 형태로 분화했다.

이처럼 뿌리 깊은 나무인데 기후위기와 탈탄소문명으로의 전환을 이야기하는 지금,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생명의 세계관을 온 사회에 전파할 수 있을까. 더구나 생명정치가 아닌, 생명을 살리는 정치가 시급한 지금. 이날의 질문은 쉽사리 해답을 찾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실마리는 주어졌다. 이번 행사를 마련한 밝은마을 생명사상연구소 주요섭 선생은 “우리 자신을 사건으로 만드는 것”, 그리고 “사건과 사건이 만나서 또 다른 차원의 사건을 일으키는 것”을 제안했다. 사건이란 우발적인 동시에 필연적이며, 이성과 논리로 포착되지 않는 느낌과 끌림, 즉 나와 다른 존재에 감응하는 영성을 담고 있다. 또한 미래로 열려 있다.

우리 자신을 사건으로 만들려면, 열어놓고 부딪치고 수용해야 한다. 고립된 상태에서는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기에 소통과 공감의 능력이 중요하다. 내용 없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아이들, 반목하는 대신 연애하는 젊은이들, 여전히 호기심 많고 명랑한 중년들, 소외와 분노를 벗어나서 참견이 아니라 참여하는 노년들이 사건을 만든다. 다시 코로나19 방역이 강화되면서 모처럼 잡았던 송년모임도 취소될 것이다. 그렇더라도 여전히 한 해를 그럭저럭 보냈다며 웃고 떠들 수 있기를!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