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기록하는 일

2021.12.25 03:00 입력 2021.12.25 03:02 수정

언젠가의 한겨울, 음악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도서 대출이나 장서 관리, 신간 악보 분류 같은 일을 하나 싶었지만 내게 주어진 일은 분류번호 스티커도 없이 뭉텅이로 놓여 있던 몇만 장의 LP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음악도서관 2층에는 먼지가 켜켜이 쌓인 악보 서가가 있었는데, 그 서가 사이엔 뜬금없이 오래된 나무 문이 하나 있었다. 조금 으스스한 기운이 풍겨 평소엔 눈길조차 주지 않던 곳이었지만 바로 그곳이 내가 일할 곳이었다. 제대로 된 이름 없이 ‘도서관 뒷방’으로 불리던 그곳은 생각보다 꽤 넓었고, 매체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음악에 관한 온갖 자료가 널려 있었다. 옛날에 사용하던 도서카드, 알 수 없는 이의 자필 악보, 오래된 논문집, 누군가가 증정한 도서들, 이제는 음악도서관에서 열람대상으로 제공하지 않게 된 LP와 SP 등.

신예슬 음악평론가

신예슬 음악평론가

도서관은 각자의 지향점에 맞게 수많은 자료를 수집·분류·제공하지만, 그 체계에 미묘하게 들어맞지 않는 자료들을 곧장 제공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아주 흥미로운 자료가 도서관에 진입했더라도 시스템에 적합하지 않거나, 혹은 체계를 구축하는 이가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것이 손닿는 곳에 결코 나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실제로 그 방에 있던 자료 중엔 지금의 음악인이 봐야 더 재미있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드는 것들도 꽤 있었다. CD나 디지털 자료로는 소장되어 있지 않았던 전자음악가 장 미셸 자르의 LP들, ‘크로스오버’의 유구한 역사를 증명하는 것만 같은 테너 김진원의 LP ‘창과 벨칸토의 만남’, 종이가 누렇게 변색될 만큼 오래됐지만 지금의 문제의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젊은 연구자들의 논문 등. 비록 이름 없는 방에 머물고 있었지만 현재의 음악계를 생각하면 언제 어디서 공유되어도 어색함 없을 자료들이었다.

동시에 나는 음악사를 떠올렸다. 음악사를 공부할 때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이름들, 혹은 절대로 기록될 수 없었을 사건들을 상상하는 일은 필수적이었다. 예컨대 가명으로 활동했어야만 했던 여성 작곡가들, 연주가의 이야기, 사라져버린 민요 등이 무척이나 많았을 것이 분명했다.

어떤 기준으로 역사를 쓰느냐, 가장 주된 시간선을 관장하는 이들이 누구냐에 따라 역사의 일부로 기록되거나 그렇지 않은 것들이 나뉘었다. 그리고 시간에는 뒷방 같은 것이 없는 만큼, 무언가에 대한 기록은 반드시 어수선한 ‘현재’에서 이루어져야만 했다.

그런 생각을 담아, 올 한 해에는 어쩌면 주류 역사 속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을지도 모르는 사건들을 기록하기 위한 작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제 막 태동하고 있는 장르(‘클래식’ 어법에 기반하고 포스트 미니멀리즘의 영향하에 있지만 장르명을 지칭하기 어려운 기악음악들)에 대한 글을 쓰고, 한국이라는 문화적 맥락 속에서 발생할 수 있었던 음악(장영규의 음악, 농악의 호흡을 담아 만든 벨라의 앨범 ‘Guidelines’)을 듣고, 공연이 아니라 전시 형태로 음악을 선보이는 이들의 작업을 리뷰하고, 선배 연구자와 함께 20년째 현대음악을 소개해오고 있는 연주단체의 이야기를 채록했다. 음악 교사와 현재의 음악교육에 관한 대화도 진행했다. 돌이켜보면 가장 보수적인 형태의 ‘음악비평’을 많이 하진 않았지만, 음악에 관해 여전히 많은 것을 배우고 기록했던 시간이었다.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도서관 서가나 음악사 책 속의 이야기처럼 말끔하지 않다. 외려 그 도서관의 뒷방처럼 분류되지 않은 상태에 가깝다. 하지만 누군가는 무언가가 관성적으로 뒷방으로 밀려나지 않도록 기록의 사각지대를 찾고, 알려지지 않은 이름을 찾고,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흐름에 시간을 쏟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나와 동료 필자들의 일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 마음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며, 내년에는 또 어떤 미지의 것들을 만나게 될지 작은 기대를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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