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튼호텔 옆 쪽방촌 이야기

2021.12.18 03:00 입력 2021.12.18 03:01 수정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지금 서울역 맞은편 양동 쪽방촌에서 살고 있는 이석기(가명)의 생애 구술을 간략히 정리하면 이렇다. “일곱 살 때부터 남의 집 살이를 했어요. 키도 작은데 논 물구덩이에 푹푹 빠지고 지게로 나락 져내고, 돈은 없이 밥이나 얻어먹는 머슴살이를 한 거지요. 열네 살 때 친구가 남의 집 쌀가마 하나를 훔쳐 같이 짊어지고 나오다 잡혀서 소년원에서 몇 개월 살고 나왔어요. 구두닦이, 넝마주이, 짐꾼, 청소, 심부름, 그냥 닥치는 대로 하면서 겨우 먹고살았어요. 가게일 도와주다 도둑 누명을 쓰고 소년원에 또 갔다 나와서, 열차 타고 무조건 서울로 왔어요. 주로 서울역과 남대문시장에서 파지를 주어 팔거나 짐 나르는 일을 했어요. ‘니야까’나 창고에서 자고 남산에서 노숙도 많이 했어요. 어느 겨울 남산 벤치에서 자다 새벽에 깼는데 눈이 수북이 쌓였더라고요. 저 눈에 묻혀 얼어 죽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에 울음이 나오더라고요. 전남 목포 신안에 있는 염전에 갇혀서 10년 정도 일했어요. 떼어먹힐 뻔한 돈을 겨우 받아 고향으로 가서 농사짓는 형에게 모두 주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 주로 노숙하면서 닥치는 대로 일했어요. 아무리 일해도 내 방 하나를 얻을 수 없었어요. 그러다 서울역에 나오는 목사 따라 교회가 운영하는 시설에 갔고 거기서 수급자를 만들어줬는데, 십일조랑 감사헌금 내고 담배나 좀 사 피우면 돈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몰래 도망 나와서 다시 서울역으로 왔다가 여기 양동에 방을 얻은 게 2019년이에요. 생전 처음 얻은 방이지요. 남들은 덥다 춥다 지저분하다 말이 많지만 저는 이 방 하나면 충분해요. 사방 벽 있는 내 방에서 자고 밥도 해먹을 수 있어서 좋아요. 양동은 서울역도 가깝고 남산으로 산책도 갈 수 있어서 숨도 트이고 마음도 편해요. 이젠 지하철이 무료니까 서울이랑 경기도 가보고 싶은 데를 여기저기 다녀요. 나 살아온 거 생각하면 참 대단해요. 못 배우고 가진 것 없고 빽도 없어서 남한테 속기도 많이 속고 명의도용도 당하고 ‘니야까’로 남의 승용차를 긁어 모은 돈을 다 털어주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살아남았잖아요. 그런데 재개발한다고 여기서 또 나가래요.”

최현숙 구술생애사 작가

최현숙 구술생애사 작가

그는 1955년생 양띠에다 외모도 성품도 딱 “양 같은 사람”이라고 불린다. 그의 생애를 듣다보면 세상 속 갖은 승냥이들이 떠올라 분노와 송구함이 인다. 지난주 그를 포함한 8명의 양동사람들과 2명의 활동가가 주인공인 구술생애사 책 <힐튼호텔 옆 쪽방촌 이야기>(홈리스행동 생애기록팀, 후마니타스)의 첫 북 콘서트가 있었다. 이야기마당 진행을 맡은 나는, 대담 내용을 정리한 인쇄물을 미리 나눠드리고 한글을 잘 읽지 못하는 그의 옆자리를 골라 앉았다. 그가 인쇄물을 들고 나오지 않아 아차 싶었는데, 글 따위와 상관없이 그의 생생한 말이 듣는 이들의 마음과 직통하는 것을 보았다. 빌어먹을 세상에서도 양 같은 마음들이 통하는 가장자리가 있는 거다.

1957년생인 김강태(가명)는 마흔 즈음인 외환위기 때 잘나가던 인생이 뒤집어졌다. “남들은 직장 잡고 결혼해서 삶을 펼쳐갈 때, 서울역 건너 지금 연세빌딩 앞 은행나무 거리에서 노숙을 시작했어요. 열 명 정도가 같이 노숙하면서 일 얻은 사람은 벌고 몸 안 좋거나 일 없는 사람은 놀고, 그렇게 로테이션으로 일을 나갔어요. 돈 벌면 식당에 맡겨 놓고 같이 밥 사먹고 술 한잔 먹고, 원래 그러던 데입니다, 거기가. 대한민국에 그런 법은 없지만, 그 자체에서 그 좋은 법을 만들어 놨어요.” 그 난장(亂場)에서 무엇을 보는지는 보는 사람 마음의 문제다.

인터뷰와 글쓰기가 진행되는 동안 주인공들이 중심이 되어 ‘양동 쪽방 주민회’를 만들었고, 양동 재개발은 막지 못했지만 쪽방주민들을 위한 임대주택 제공을 받아냈다. 또 흩어지지 않게 되었으니, 돈과 가족 따위를 넘은 좋은 마을을 함께 만들고 넓혀나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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