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켈이 있었다면

2022.02.28 20:53 입력 2022.02.28 21:03 수정

2007년 1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러시아 남부 휴양도시 소치에서 첫 정상회담을 했다. 푸틴은 회담장에 몸집이 큰 애견 ‘코니’를 풀어놨다. 개를 싫어하는 메르켈이 다소 굳은 표정으로 개를 곁눈질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됐다. 푸틴이 “개 때문에 불편한가. 이 개는 다정하고 올바르게 행동할 것”이라고 하자, 메르켈은 러시아어로 “어쨌든 개가 기자들을 물진 않을 것”이라고 응수했다. 회담 사진이 공개되자 푸틴이 첫 만남부터 메르켈을 겁주려 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9년이 흐른 2016년, 푸틴은 “메르켈 총리가 개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사과했다”면서 “메르켈은 매우 열린 사람이며, 나는 그를 믿는다”고 했다.(독일 빌트지 인터뷰)

김민아 논설실장

김민아 논설실장

다시 6년이 흐른 2022년, 푸틴은 기어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우크라이나 내무부에 따르면 지난 26일까지 어린이 14명을 포함해 민간인 352명이 숨졌다. 21세기에 이런 야만이 자행될 수 있다니. 분노한 세계 시민들은 거리로 뛰쳐나가 “전쟁 반대”를 외치고 있다. 푸틴의 오만하고 무책임한 행각을 중단시키지 못하면, 모두가 위험해질 수 있음을 알기에. 신냉전의 음습한 그림자가 지구촌을 뒤덮을 수 있음을 알기에.

우크라이나 사태가 악화일로를 걸으며 ‘독일 총리 메르켈’의 부재를 아쉬워하는 이들이 많다. 지난해 말부터 관련국가 정상들이 중재에 나섰지만 외교력에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4월 대선에서 재선을 노리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해결사를 자임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경우 ‘가혹한 경제제재를 가할 것’이라 거듭 경고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런 바이든은 메르켈의 후임인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를 두고 “메르켈처럼 유럽을 러시아에 대항할 수 있도록 단합시키지 못한다”고 사석에서 비판했다고 한다. 메르켈은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강제병합한 이후, 유럽연합의 대러시아 제재를 이끌었다.

지난해 말 은퇴한 메르켈 리더십의 요체는 ‘실용’과 ‘인내’일 것이다. 미국 저널리스트 케이티 마튼이 4년간 메르켈 집무실을 드나들며 취재하고, 각국 정치인·관료들을 인터뷰해 쓴 책 <메르켈 리더십-합의에 이르는 힘>을 보면 잘 드러난다. “러시아든 중국이든, 메르켈은 독재정권에 접근할 때 실용적 방식을 택했다. 그는 과장된 언사를 동원해 독재자에게 공개 망신을 주는 방식은 역효과만 낳을 뿐이라며 경멸한다.” 책에 따르면, 메르켈은 총리로 있는 동안 푸틴과 정기적으로 대화를 했다. 30분쯤 푸틴의 장광설을 들어준 뒤 말하곤 했다. “블라디미르, 다른 나라들은 그 상황을 그렇게 보지 않아요. 그런 시각은 당신의 이익에 도움이 안 돼요.”

저자 마튼이 인용한 우크라이나 인권운동가 막심 에리스타비의 말이다. “메르켈은 푸틴에게 창피 주는 법을 알아요. 인권침해와 잔혹행위가 그(푸틴)의 감시 아래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죠. 메르켈은 그에게 책임이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요.”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강제병합하고 우크라이나를 공격하는 동안, 메르켈은 38회나 푸틴과 통화를 했다. 당시 협상팀 관계자에 따르면, 그들은 날마다 접촉했다. 메르켈은 참을성 있는 대화를 통해 푸틴의 공격적이고 과장된 행동을 막으려 노력했다. 분노에 찰 만도 한데, 화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몇 년 후 마튼과 인터뷰하면서, 메르켈은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말했다. “외줄을 타는 곡예사처럼 집중하고 문제에 몰두합니다. 오로지 다음 걸음만 생각하죠.” 2014년 당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보좌관들에게 지시하곤 했다. “앙겔라한테 전화 연결해.” 마튼은 메르켈에게 긴 정치 인생 동안 자신을 지탱해준 특성을 물었다. 답이 돌아왔다. “참을성이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후 메르켈은 “(러시아가) 냉전 종식 후 유럽 역사에 깊은 분열을 일으켰다”고 비판했다. 메르켈 자신도 현 사태에 전혀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당시 경제제재가 미온적이었다는 비판이 나오는 터다.

그럼에도 지금 메르켈이 유럽을 이끄는 위치에 있다면, 어떻게 했을까 상상해본다. 푸틴이 이른바 ‘특별 군사작전’ 개시 단추를 누르기 전까지 통화하고, 통화하고, 또 통화하지 않았을까. 침공 후에도 “블라디미르”에게 무고한 인명살상의 ‘책임’을 단호하게, 그리고 집요하게 상기시키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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