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개혁가’ 유수원의 삶과 우정

1741년 2월8일, 영조는 관제 개혁론을 들고 온 농암(聾菴) 유수원이라는 사람을 조정에서 맞이한다. 그의 <관제서승도설(官制序陞圖說)>을 검토한 영조는 첫 질문을 던진다. 과연 그의 개혁론을 따라 제도를 바꾸면 정말로 인재를 공정하게 임용할 수 있는가? 실록은 이때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음을 기록한다. 왕의 질문에 유수원이 답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잠시의 침묵 이후, 영조는 눈앞의 사대부가 말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영조는 주서(注書)에게 질문을 써서 유수원에게 보여주라고 명하고, 둘은 이윽고 필담으로 대화를 이어간다.

소진형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소진형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유수원은 정치적으로 불우한 삶을 살았던 인물로, 문과에 급제해 정언으로 벼슬을 시작했으나 종숙부가 역적이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버려져 기용되지 않았다. 소론 당색에 속한 그는 당시 정치와 사회에 불만이 많아 혁신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대신들을 함부로 비판했다고 파직당했다. 소론이 정권을 잡은 경종대에도 크게 중임되지 못했고, 영조가 즉위하자 노론에 의해 정치적으로 배제되어 작은 고을의 수령으로 지방을 전전했다. 40대에 큰 병을 앓아 청력을 잃은 그는 자신의 호에 스스로의 장애를 자조적으로, 또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귀먹을 농(聾) 자를 넣었다.

유수원이 보기에 당시 조선은 고위 관료들이 상인·부호와 유착하고, 서리는 백성을 착취하는 곳이었다. 문제의 원인은 법과 제도가 공정하게 시행되지 않아 누군가 세금을 제몫 이상으로 더 내고, 형벌을 회피하며, 자격요건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관직에 오르는 일이 빈번한 데 있었다. 정치적 분열과 부패를 막기 위해서는 제도의 개혁이 필요하다. 따라서 관제개혁이 사회개혁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했던 유서원은 <관제서승도설> 및 이전에 저술한 <우서(迂書)>에서 이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우서>를 읽은 동료 고관들은 영조에게 그의 개혁안을 검토할 것을 누차 건의했다. 수년이 흘러, 붕당의 폐해를 해결하고자 했던 영조는 마침내 유수원을 불러 필담으로 이야기를 들었다. 얼마 뒤 한림회천법, 즉 사관(史官)들이 후임을 뽑을 때 공정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자신의 당파 사람을 추천하는 제도가 그의 개혁안에 따라 폐지되었다.

뛰어난 구상과 별개로 유수원이 가진 장애나 역적 집안 출신이라는 한계를 생각해보면 개혁론을 실현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가 영조를 만나 자신의 정치개혁론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친구의 재능을 아끼고 사랑한 소론의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수원의 정치개혁론에 동의했던 소론 고관들은 관료로 현달하지 못한 그가 왕을 직접 만날 수 있도록 주선했다. 청각 장애라는 신체적 한계가 능력을 인정받는 데 걸림돌이 될 수는 없었다. 유수원을 이해하고 아꼈던 친구들은 다름 아닌 영조의 최측근 관료이자 법과 제도에 밝은 실무자였던 이종성, 이광좌, 조현명이었다. 이러한 지지에 힘입어 그의 개혁론은 제도화될 수 있었다.

유수원의 삶은 동화 같은 성공담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1755년 소론 과격파의 역모사건인 나주괘서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당했다. 약 반세기 후 노론 심노숭이 기록한 <자저실기>는 함께 처형당한 소론의 동료 심악의 이야기를 옮기고 있다. 문초에서 심악은 나라를 위한 정성이 유수원의 마음이라고 답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유수원과 함께 죄를 입는다면 죽더라도 기쁘겠습니다.” 유수원의 친구들은 그의 웃음이나 표정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필담을 통해 그의 생각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가난한 그가 병에 들면 비싼 약재를 구해 수레로 날라주었다고 한다. 유수원은 귀가 멀고 집안도 멸족한 불행한 삶을 살았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았던 친구들이 보냈던 사랑과 존경은 후대인의 마음에도 남기는 바가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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