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라, 여사, 당선자…호칭의 어원학

2022.06.14 03:00 입력 2022.06.14 07:07 수정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가 13일 오후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에 참배한 뒤 권양숙 여사를 예방,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가 13일 오후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에 참배한 뒤 권양숙 여사를 예방,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2월11일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김윤 국민의당 서울시당위원장은 이재명 대통령 후보의 부인을 ‘도지사 마누라’로 불렀다가 김어준 진행자한테서 “표현을 바꾸라”는 핀잔을 받았다. 그러자 김윤은 ‘도지사의 처’로 바꿔 말했다. 순우리말이 어느새 비속어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이봉수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 원장

이봉수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 원장

‘처’(妻)라는 한자말은 갑골문자에서 여자의 머리칼을 만지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고대 중국이 부권사회로 전환된 뒤 여성의 정조가 강조되는데 ‘처’는 ‘머리칼을 만져도 되는 여자’라는 뜻이니 좋은 말은 아니다. 이에 견주어 ‘마누라’는 아내를 허물없이 부르는 말이 됐지만, 원래는 극존칭이었다. ‘만’은 ‘첫째, 우두머리’라는 뜻이었으니 ‘맨’꼭대기, ‘맏’아버지 등에 말의 뿌리가 남아 있다. ‘오라’는 집안·가문을 뜻하는 말이고 ‘만오라’는 ‘집안의 우두머리’라는 뜻이 되니 모계사회의 유습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마노라’를 거쳐 ‘마누라’로 바뀌었다.

‘여사’란 호칭은 노무현·문재인 정권에서 한겨레가, 현 정권에서 TBS의 김어준이 논란의 중심이 됐다. 한겨레는 창간 이래 모든 이에게 직책이나 존칭인 ‘씨’를 붙여왔으나 문재인 대통령의 마누라에게 ‘김정숙씨’란 호칭을 썼다가 독자들의 압력에 원칙을 포기하고 ‘여사’로 바꿨다. ‘씨’로 불리는 보통사람들은 졸지에 신분이 격하된 셈이다.

졸지에 비속어가 되거나 신분 하락

‘열사’ ‘지사’ ‘박사’ 등에 모두 ‘선비 사’(士) 자를 쓰는데 ‘여사’(女史)란 말에만 유독 ‘사기 사’(史) 자를 쓴 이유가 뭘까? ‘여사’는 고대 중국에서 후궁의 시중을 들며 한편으로 그의 행실을 기록하던 이였으니, 존경의 뜻이 담긴 호칭은 아니었다.

언론이 남편의 대통령 당선에 마누라 호칭을 ‘씨’에서 ‘여사’나 ‘영부인’으로 바꿔 쓴 것도 어쭙잖은 일이다.

‘영부인’(令夫人)도 원래 남의 아내를 높여 이르는 말이었는데 어느새 대통령 부인을 뜻하는 ‘영부인’(領夫人)으로 잘못 쓰고 있다. 전두환 정권 때는 부인 이순자씨 동정을 전하면서 ‘영부인 이순자 여사는’으로 시작하는 뉴스가 대거 등장했다. ‘거느릴 령’(領) 자를 쓰는 ‘대통령’ 호칭도 민주주의 시대에 맞지 않지만 ‘영부인’은 도대체 누굴 거느린다는 건가?

‘대통령 당선인’이란 말이 널리 쓰이게 된 것은 이명박 정권부터다. 헌법재판소 공보관은 헌법 규정대로 ‘당선자’가 옳다고 밝혔지만, 이동관 인수위 대변인은 ‘당선인’을 쓰기로 한다고 발표했고 대부분 언론이 호응했다. ‘당선자’를 기피한 것은 ‘놈 자’(者)가 들어 있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놈’이란 말은 원래 사람이나 남자를 가리키는 단어였는데 우리말 비하현상이 진행되면서 욕이 됐다. 천자문에 ‘놈 자’(者)로 풀이되고 <청구영언>에 전하는 시조에도 ‘온 놈이 온 말을 하여도 님이 짐작하소서’란 구절이 있는데, 욕을 쓸 이유가 없는 대목이다.

‘놈 자’(者)가 비속어처럼 취급되는 데는 손석희 아나운서도 기여했다. “아소 장관은 ‘창씨개명은 조선인이 희망했다’는 망언을 한 바 있습니다. 도대체 우리들은 언제까지 이런 자의 헛소리를 들어야 하는 걸까요? 여기서 자는 ‘놈 자’ 자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재치에 반했지만 ‘놈 자’(者)의 의미는 잘못 전달했다. 그 글자가 비속어라면 ‘노동자’ ‘유권자’ ‘성자’ ‘성직자’란 말은 어떻게 되나?

호칭에는 신분차별과 이데올로기가 끼어들기 마련이다. ‘근로자’란 말을 예로 들면 ‘부지런할 근’(勤) 자를 쓰니 부지런하게 일하지 않으면 노동자가 아니란 말인가? 근로기준법은 직역한다면 ‘부지런히 일하는 기준을 정한 법’이니 세상에 이런 ‘악법’이 어디 있나?

신분에 따라 다른 호칭은 반민주적

‘근로자의날’은 일본도 ‘노동절’이라 부르는데 우리는 여전히 바뀌지 않고 있다. 자유당 시절인 1958년부터 노동절로 행사를 치러왔는데 1963년 박정희 정부가 ‘근로자의날’로 바꿨다. ‘근로자의날’인 5월1일 윤석열 대통령은 ‘근로자의 땀과 노력’을 치하했다. 노동절은 1884년 미국 노동단체들이 8시간 노동 실현 등 일을 덜하려고 총파업을 벌인 걸 기념해 제정됐다.

말의 의미 변화는 문화현상이기에 원래 의미를 고수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언론이 일관성도 없이 신분에 따라 다른 호칭을 붙이거나 노동자를 적대하는 호칭을 붙인다면 반민주적이라는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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