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모임에 가면 영화 <헤어질 결심> 얘기가 반드시 나온다고 한다. “<색, 계>에서부터 알아봤지만, 탕웨이는 정말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여성이야. 관능적이면서도 품위 있는 중저음의 목소리가 정말 사람 미치게 하네.” “멜로, 스릴러, 미스터리를 솜씨 좋게 버무린 박찬욱의 미학적 미장센은 또 어떻고.” 세계 3대 영화제의 하나인 칸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불륜 미화라는 악플 세례로 극장에서 금방 사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입소문을 타고 다시 불붙는가 싶더니 n차 관람러의 찬탄하는 글이 인터넷 공간에 줄지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두 번, 세 번, 네 번 보니까 비로소 영화의 아름다움이 보이더라.”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사회학자의 직업병일까? 영화를 보는 내내 참혹한 젠더 문화의 질긴 생명력을 보는 것 같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1970년대 말 호스티스 멜로영화에나 나올 법한 낯익은 인물들.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온 가녀린 하층계급 여성을 폭력으로 지배하는 잔혹한 하층계급 남성. 성적으로 타락하기 이전의 원형의 순수 여성을 사랑하는 또 다른 남성. 그런 사랑의 허약함을 깨닫고 홀로 세상을 버리는 여성. 그녀의 흔적을 찾아 여기저기 헤매고 다니는 남성. 비극 서사의 기본 골격이 같다. 물론 변화도 있다. 탈(脫)지방 한국 여성이 탈(脫)국경 조선족 여성으로, 성 노동자 호스티스가 돌봄 노동자 간병인으로 바뀌었다. 현모양처를 꿈꿨으나 호스티스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한국 여성은 현모양처를 넘어 슈퍼우먼을 실천하는 원자력발전소 연구원으로 우뚝 올라섰다. 원형의 처녀성을 추앙하던 한국 남성은 일과 가정 모두 잘해내면서도 급작스러운 사랑 앞에 품위 있게 ‘붕괴’할 정도로 단단해졌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카를 마르크스의 말이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은 이를 비틀었다. “종교가 아니라 젠더가 대중의 아편이다.” 현대사회도 다른 사회와 마찬가지로 생물학적 차이를 토대로 일종의 성 등급을 마련한다. 여성은 열등한 성 등급에 속한 소수자다. 하지만 장애인이나 유색인종과는 다르다. 우선 사회적으로 격리된 존재가 아니다. 공공장소에서 여성과 남성이 서로 뒤섞여 살아가는 것이 그 예다. 더 나아가 여성은 모성, 순수함, 부드러움, 성적 매력과 같은 가치를 통해 추앙받아야 할 고귀한 존재다. 성 등급은 생물학적 차이가 낳은 자연적 산물이 아니라 성별 노동 분업, 성별 호칭 구별과 같은 제도화된 실천이 만든 문화적 구성물이다. 여성은 자신을 존중받아야 할 독특한 소수자로 공연한다.

고프만의 이러한 주장은 1970년대 미국 사회의 중산층에서 이루어지는 젠더주의를 준거로 했다. 중산층에서는 이러한 젠더주의를 실천하는 것이 상호보완적이기 때문에 여성과 남성 모두에 만족감을 준다. 하지만 이제는 통하지 않는다. 남성은 공적 영역에서 생산 노동하고 여성은 사적 영역에서 재생산 노동한다는 거짓말이 들통났다. 여성은 줄곧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넘나들며 노동해왔다. 문제는 여성이 어느 영역에 있든 사회적 가치가 낮은 일을 전담하면서도 추앙받아야 할 독특한 소수자로 이상화된다는 점이다. 그러려면 전통적인 젠더주의를 실천해야 한다.

고등교육을 받은 문명화된 한국 여성이 열등과 추앙을 동시에 공연하는 젠더주의를 반길 리 없다. 못 배워 미개하지만 간병할 정도로 관능적인 조선족 여성이 대신 이 공연을 떠맡았다. 대본을 곧이곧대로 해석할 만큼 ‘꼿꼿한’ 조선족 간병인 여성은 엘리트 한국 남성에게 자신을 추앙하라며 바닷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영원한 미제사건이 되어 한국 남성의 환상 속에 불멸하리라! 남성의 ‘추앙할 결심’을 부추기기 위해 여성이 차디찬 바닷속에 자신을 순장하는 낡은 젠더 서사가 가슴 저미는 로맨스로 둔갑하는 현실은 서글프다 못해 추악하다. 박찬욱은 이 추악한 현실과 ‘헤어질 결심’을 다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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